대법원, “무죄추정원칙 반하는 표현 피해야”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발표하는 것은 “객관적이고도 충분한 증거나 자료를 바탕으로 한 사실 발표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뒤늦게 확인됐다. 지난달 30일 대법원 제2부(주심 강신욱 대법관)는 “담당 검사가 직무상 알게된 피의사실을 공표하여 언론에 보도되게 함으로써 원고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판단한 원심(창원지방법원 2000.11.9. 선고 2000나4078 판결)을 확정했다.
사건은 97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산지검은 감금․폭행 및 갈취 미수 등의 혐의로 원고 조모 씨 등 3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담당검사는 기자들에게 사건내용을 설명하면서 그 자리에서 수사기록을 열람할 수 있게 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당시 검사가 “피의 사실의 진실성을 담보할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고 “국민들에게 급박히 알릴 현실적 필요성이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며, 피의사실 공표행위가 정당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97년 당시, 기소된 조 씨는 범죄에 가담하지 않은 사실이 인정돼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또 수사기관의 발표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여 유죄를 속단하게 할 우려가 있는 표현이나 추측 또는 예단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당시 검사는 언론매체를 통하여 피의사실이 공표될 경우 “피해자인 원고는 물론 그 가족 등 주변인물에 대하여 사실상 회복하기 어려운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가할 우려”가 있음을 충분히 예상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이번 판결을 환영하며 “피의사실이란 수사기관이 수사과정에서 알게 되어 의심하고 있는 사실일 뿐”이라며,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발표할 때는 어느 누구도 특정할 수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차병직 변호사는 이번 사건에서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공익성을 문제삼으며, 개인의 프라이버시권과 다수의 알권리가 충돌할 때 “알권리가 단순한 호기심 충족의 차원이라면 개인의 권리보호에 좀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평했다.
‘객관적이고 타당한 근거없이 피의사실을 발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취지의 판결은 10월 ‘공개수배 프로그램 사건’, 8월 ‘회사기밀 유출 사건’, 7월 ‘구국전위 간첩사건’ 등의 손배소송에서도 일관되게 내려지고 있다. 수사기관이 피의자와 그 가족의 인권에 대해 보다 심도 깊은 자기반성을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