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가부장적 인식 그대로 드러나
가부장적 법체계가 성폭력 사건을 공개했던 피해여성들을 도리어 법정의 피고석에 세웠다. 지난달 30일 서울지검 남부지청(담당 이재헌 검사)이 KBS 노조 전 부위원장 강철구 씨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피해자 2인과 ‘운동사회 성폭력뿌리뽑기 100인위원회’(아래 100인위)를 기소하기로 결정한 것이 뒤늦게 확인됐다. 남부지청은 공소장에서 “공연히 허위 사실을 적시해 피해자 강철구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공소제기의 이유를 밝혔다.
이번 기소 결정은 소설가 박모 씨가 100인위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사건에 대해 지난 8월 불기소 처분했던 서울지검 서부지청(담당 강지원 검사)의 결정과도 상반된 것이어서 더욱 문제가 되고 있다. 당시 서부지청은 100인위가 운동사회 내 성폭력 추방을 위해 가해자 실명을 공개한 것에 대한 공익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남부지청은 100인위와 피해 여성들이 주장하는 내용의 진실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명예훼손죄의 또 하나의 판별기준인 공익성은 전혀 고려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부지청의 이같은 결정은 강 씨의 성폭력 가해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어서, 앞으로의 법정 다툼은 명예훼손죄의 성립 여부 뿐 아니라 성폭력 사실 자체까지도 논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강 씨 관련 성폭력 사건은 지난 해 10월 KBS 노조의 여성활동가 2인에 의해 제기됐다. 이들 각각은 지난 95년과 97년 자신들이 당했던 성추행 및 강간미수 사실을 노조에 알리고 징계를 요청했다. 성폭력특별법은 고소기간을 사건 발생 후 1년 이내로 제한하고 있어, 이들은 당시 성폭력 피해를 법에 호소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가해자로 지목된 강 씨는 가해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피해자들 뿐만 아니라 지난 2월 이 사건을 공개했던 100인위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번 남부지청의 기소 결정에 대해 100인위는 12일 성명을 내 “피해자들이 법에 의지해 성폭력 피해를 보상받을 방법이 차단된 상황에서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를 고소하고 검찰이 가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를 기소한 작금의 사태는, 여성인권 보장에 무능한 우리 사회 법체계의 가부장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사례”라고 비판했다.
100인위 쪽의 변론을 맡고 있는 이상희 변호사는 “성폭력 사건은 그 특수성 때문에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입증 책임이 있는 검사는 피해자의 진술과 정황들을 좀더 숙고하고 판단해야 하는데, 이번 결정은 그런 과정을 무시한 듯하다”고 이번 결정을 평했다.
한편, 조순경 교수(이화여대 여성학)는 “여성인권에 대한 인식이 발전한 나라들에선 법조인을 양성할 때 피해자의 경험에 기반해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도록 교육하고 있다”면서, “우리의 경우는 사회에서 길러진 성차별적인 시각을 수정할 기회가 어디에서도 주어지지 않는다”고 법조인 양성과정의 문제를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