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전후 피학살자 유족증언대회' 열려
“오늘 이 증언대회가 우리 역사에 진실을 밝혀내고 서러운 한들이 풀려 화해와 평화를 도모하는 그 시발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아래 범국민위) 이해동 상임공동대표의 대회사로 4일 '2002 한국전쟁전후 피학살자 유족증언대회'(아래 증언대회)는 시작됐다. 이날 증언대회는 그 동안 알려지지 않은 피학살 사례들이 새롭게 증언돼 눈길을 끌었다.
거창에서 올라온 신용은 씨는 할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눈물로 증언했다. 정부는 신씨의 아버지를 보도연맹에 가입시켰으며, 어느 날 경찰서로 부른 후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학살했다. 당시 5세였던 신씨는 자신에게 깨엿을 주면서 "내 빨리 갔다 올께"라고 한 후 집을 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생생히 기억했다.
거제에서 온 서철안 씨는 경찰이 7백50명 정도의 보도연맹원들을 50년 7월 25일부터 열흘간 매일 70여명씩 수장시킨 사실을 고발했다. 당시 서씨의 둘째형도 보도연맹에 억지로 가입돼 죽임을 당했다. 서씨의 둘째형은, 죽기 전 큰형과 면회할 때, '어제 밤에 옆방에 있던 사람들의 구두발자국 소리가 났고 이후 뱃소리가 들렸다'며 '나도 오늘 죽을 것 같으니 앞으로 면회오지 마라'고 자신의 죽음을 미리 전했다고 한다. 서씨는 "큰형에게 그 말을 듣고 나도 막 죽고 싶었다"라며, "재판도 없이 물에 빠뜨리는 게 사람으로 할 일이냐?"라고 울분을 토했다.
완도지역 김보희 씨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인민군 복장을 하고 들어와 환영하는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고 증언했다. 그때 완도 전역에서 학살된 수만 해도 1천여 명. 남원의 김덕초 씨는 "나는 인민군이나 빨치산이 양민을 학살하는 것은 못 봤지만 국군이 학살하는 것은 직접 봤다"고 말했다. 김씨의 증언에 따르면, 50년 11월 17일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17∼35세 청년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간 후 40분 정도 뒤에 총성이 울렸다고 한다. 그외 나주 봉황면 철야마을 학살, 단양 괴개굴 미군폭격에 의한 학살 등이 새롭게 증언됐다.
증언대회에서는 노근리 사건의 최근 상황이 소개되기도 했다. 노근리 사건 대책위의 정구도 씨는 "미국 정부는 추모비를 건립해 주겠다고 하면서 한국전 당시 미군에 의한 희생자 전체에 대한 추모비를 건립하려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리고 "이는 노근리 사건을 계기로 다른 사건까지 덮어버리겠다는 의도"라며, 대책위가 추모비 건립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날 증언대회에는 1백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3시간에 걸쳐 19명의 유족 증언이 이어졌다. 그 동안 한국사회에서는 인민군에 의한 학살만이 과도하게 부각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학살의 90% 이상이 한국군이나 경찰에 의한 것임이 밝혀지면서 민간인학살 문제는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범국민위 김동춘 사무처장은 "전쟁상황은 '적과 아'라는 이분법을 강요하는 상황"이라며, "인권개념이 없는 국가공권력은 전쟁시 적에게 동조할 우려 때문에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다"고 밝혔다. "왜곡된 역사를 꼭 바로잡아 달라는 것밖에 할 말이 없다"는 유족들의 통한은 50년간 강요당한 침묵을 조금씩 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