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빛고을 광주를 핏빛으로 물들이며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노태우 일당을 어떠한 형태로든 심판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민중들의 지고한 염원은 이미 역사적 사건이 됐다. 95년 민중들의 학살자 처벌 투쟁이 그 염원을 현실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내란필벌, 역사 바로 세우기
95년 7월 검찰은 5·18 학살자들에게 공소시효 만료 직전 사법적 면죄부를 부여함으로써 더 이상의 처벌을 불가능하게 만들려 했다. '통치행위론', '성공쿠데타론' 등 해묵은 형법이론을 근거로 전·노 일당을 불기소 처분했던 것. 그러나 이날은 역설적이게도 15년 동안 쌓여왔던 민중들의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하면서 학살자 처벌 투쟁이 각계각층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날이기도 하다.
검찰의 불기소 직후 5·18 관련 단체 회원들은 명동성당 천막농성에 돌입했다. 전국연합 등 사회단체들의 규탄 성명도 연일 이어졌다. 법계와 학계는 검찰의 논리를 반박하는 이론적 근거를 생산해냈고, 노동자·농민·학생들은 주말마다 국민대회를 열었다. 천주교, 기독교, 불교도 '학살자 처벌'에 한 목소리를 냈고, 여기에는 전국유림들과 서울시의회도 함께 했다.
각계각층의 참여 속에 형성된 거대한 5·18 투쟁의 흐름은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5·18 특별법' 제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그 해 12월 5·18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이듬해 1월 전·노 일당이 기소됨으로써, '성공한 내란이라도 반드시 처벌돼야 한다'는 역사적 선례를 남기게 됐다.
단죄, 그러나 미흡한 진상규명
97년 4월 대법원은 전·노 일당에 군사반란, 내란, 내란목적 살인죄를 적용해 단죄함으로써 과거 국가범죄에 대한 최초의 처벌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검찰수사와 재판에만 맡겨진 5·18 진상규명의 과업은 총체적인 진실규명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당시 과거청산국민위원회는 판결 내용에 대해 "5·18 학살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어졌고, 이에 따라 광주 현장에서 몇 명이 죽었으며, 어떻게 죽었는지 실체적 진실은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고 평한 바 있다. △발포명령 등 학살의 지휘체계 △미국의 개입여부 △희생자의 정확한 수 등은 여전히 규명되어야 할 과제로 남게 됐다.
5·18의 원인과 구조에 대한 미흡한 진상규명은 재발방지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필연적으로 불철저한 책임자 처벌로 이어졌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전·노 사면이 이루어진 것은 이를 반증한다. 사실 사건 자체의 단죄에만 초점을 맞춘 검찰수사와 재판으로는 총체적인 진상규명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95년 당시 마련된 '5·18 특별법 범국민 단일안'은 군사반란과 내란의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인권침해의 진실을 총체적으로 밝혀내기 위해 각계로 구성된 '진실규명 국민위원회' 설치를 제안한 바 있으나, 이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제화'되는 역사, 반복되는 한계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명예회복 △피해배상 △정신계승 등 5·18 문제해결을 위한 5대원칙은 투쟁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됐고, 이후 과거 국가범죄의 재발방지를 위한 투쟁의 원칙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이 중 진상규명은 모든 문제에 선행하는 출발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5·18 투쟁은 미흡한 진상규명과 불철저한 처벌의 문제를 뒤로하고, 명예회복과 피해배상, 기념사업으로 중심을 이동해 버렸다. 이에 대한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영일 소장의 비판은 날카롭다. "5·18 투쟁은 70년대 민주주의 운동이 노동·농민운동 등 계급운동으로, 교육·환경운동 등 부문운동으로 확대 재생산될 수 있는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분명 성과가 있다. 하지만 진상규명보다는 보상과 기념사업에 치우쳐 개별적인 민원처리 수준으로 격하되는 양상을 보여왔고, 5·18 정신을 살아있는 역사로 생산하지 못하고 박물관 속에서 박제화하는 현상을 초래했다."
광주인권운동센터 최완욱 사무국장은 "5·18 투쟁의 가장 큰 문제점은 (피해) 당사자 중심으로 운동이 진행됐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경험적으로 피해 당사자들은 개별보상의 유혹 앞에서 '총체적인 진실규명을 통한 재발방지'라는 과거청산의 대의를 내팽개치는 경향이 있었다. 거창 신원리 학살사건, 제주 4·3사건이 그러했으며, 최근 의문사와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문제에서도 동일한 양상이 나타났다.
의문사위 염규홍 보고서팀장은 "개별보상은 국가의 범죄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를 다시 그 국가가 심사하는 격"이라며, "심사과정에서 국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돈으로 피해당사자를 유혹할 수 있다"라며 단호히 반대했다. 그 대안으로 염 보고서팀장은 '진상규명 우선' 원칙과 '집단배상에 이은 개별보상' 수순을 제안했다. 개별보상 신청에 앞서 국가가 먼저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누구에게 얼마만큼 어떤 방식으로 배상할 것인가를 정해 집행하자는 취지다.
5·18 정신을 오늘의 역사로
이영일 소장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학살자들을 재처벌하진 못하겠지만, 그들이 적어도 당당하고 떳떳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진상보고서를 다시 작성해야 한다"라며 5·18 진상의 종합적인 재규명을 제안했다. 전·노 재판 직후 방송대 곽노현 교수가 제안했던 '진실정의위원회' 등과 맥이 닿는다.
한편, 최완욱 사무국장은 "현재의 한국사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어떠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면서, "광주를 '인권의 도시'라고 부를 때 과거(5·18의 이미지)에 의존하지 말고 오늘의 인권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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