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시효 문제를 핑계로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 의무를 외면했다.
21일 대법원 2부(주심 배기원 대법관)는 삼청교육대 피해자 강모 씨가 "88년 노태우 전대통령이 보상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대한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구지법 항소부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88년 당시 노 전대통령은 "광주민주화운동, 공직자 해직, 삼청교육대 사건 등에 대해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고 국방부에서 피해신고도 접수했지만 후속조치는 없었다.
대법원은 "당시 대통령 담화는 시정방침일 뿐 후임 대통령이 승계할 법적 의무는 없다"고 전제하고 "노 전 대통령이 후속조치 없이 퇴임한 시점에 약속이 깨졌다고 보고 그 때부터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며 93년 2월 24일을 소멸시효 시점으로 봤다. 따라서 예산회계법의 국가배상 소멸시효인 5년이 지난 98년 2월 이후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들은 보상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동안 하급법원에서 "시효가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라는 전향적 판결을 잇달아 내놨으나, 형식논리에만 집착한 이번 대법 판결은 흐름을 다시 역전시켰다. 지난 1월 서울지법 민사합의27부(재판장 김영감 부장판사)는 "특별담화는 국가의 국민에 대한 약속이므로 노 전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7월 부산지법 민사합의7부(재판장 황종국 부장판사)도 "대통령의 약속과는 달리 14대·15대 국회에서도 보상이 이뤄지지 못했다"며 16대 국회 개원 후 상당기간이 흐른 2001년 6월을 약속이 깨진 시점으로 본 바 있다.
이에 따라 피해자들은 현재 국회에 계류된 보상법안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게 됐다. 지난 10일 국회 국방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어 지난 8월 이창복 의원이 발의한 '삼청교육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은 국무총리 산하에 '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를 설치해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여부와 명예회복 관련 사항을 다루도록 했다. 이 법안은 23일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심의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명예회복'과 '보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정작 사건의 전말을 밝힐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다루지 않고 있다. 반인도적 국가범죄의 경우 공소시효를 배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완전히 무시됐다. 또 심의과정에서 보상 대상자를 사망·실종·부상자와 유족으로 한정하고 "삼청교육을 받은 사실이 있는 자"는 삭제해 근본적으로 '불법체포'에 해당하는 삼청교육대 운영에 역사적 면죄부를 주게 됐다. 억울하게 체포·감금된 데 대한 정신적 피해는 보상받을 길이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삼청교육대인권운동연합 전영순 회장은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이 법안이 통과되면 23년간 달고 있던 '깡패'라는 이름표를 떼게 된다"며 "추후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을 위한 법 개정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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