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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조이여울의 인권이야기

폭력의 낭만화


가끔 악몽처럼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였는데,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웬 아저씨가 한 아주머니를 눕혀놓고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자식으로 보이는 언니, 오빠가 서 있었다. 수많은 학부모들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는데, 나로 하여금 정말 이 날의 일을 못 잊게 만든 건 주위 어른들의 태도였다.

"여자가 저렇게 뻣뻣해서 남편 비위를 못 맞추니까 두들겨 맞지." "저러고 나도 내일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산다."

사람이 흙바닥을 뒹굴며 두들겨 맞고 있는 것을 보고도 '맞을 만 하다'론과 '부부싸움 칼로 물 베기'론을 버젓이 들이대는 것이었다. 어른들의 그런 반응을 접하면서, 이 세상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처음 감지했던 것 같다. 불행히도 그 이후 알게 된 세상은 훨씬 더 많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러 방식으로 '은폐'되거나 '정당화'되거나 심지어 '미화'된다. '집안 일'엔 남(특히 경찰)이 참견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 속에서, 많은 아내들이 죽거나 죽이기 전까지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어날 수 없다. 강간 혐의로 전 애인을 고소한 여성은 검찰로부터 '전에도 같이 자 봤으면서 뭘 그러냐'는 소리를 듣는다. 반면 강간범들은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론에 힘입는다. 여자를 납치해서 강제결혼을 한 남성들의 이야기는 호탕한 무용담이다.

최근 헤어진 여자친구의 학교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인 남자의 얘기가 화제다. 남자는 대형 플래카드와 피켓을 동원해 여자의 이름을 밝혀가며 '내게 돌아오라'고 했고, 이를 보도한 매체는 '용감한 구애 시위'라 칭했다. 그 날 거리에선 남자를 격려해주고 어묵까지 떠 먹여줬다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의 반응 역시 '그 놈은 용감했다'였다.

그러나 그런 식의 일방적인 애정공세를 당해 본 경험이 있는 여성들의 반응은 달랐다. 한 마디로 '치를 떨었다'. 왜냐면 그 남성의 행동은, 안 당해 본 사람은 그 고통을 모른다는 '스토킹' 행위이기 때문이다. 싫다는 사람을 쫓아다니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어떤 의견도 다 묵살하고, 사귀었을 때의 일을 직장 동료들에게 다 알리겠다고 협박하고, 물리력까지 동반해 사람의 피를 바짝 말리는 범죄. 이것이 스토킹의 실체다.

스토킹 피해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말한다. 스토커의 행위만큼이나 공포스럽고 괴로운 건 주위사람들의 왜곡된 시선이라고. "얼마나 사랑하면 그럴까", "남자의 순정을 안 받아주면 벌 받는다", "반드시 사랑을 쟁취하십시오" 따위의, 폭력을 낭만화시키는 또 다른 폭력들 말이다.

(조이여울 님은 여성주의 저널 <일다> 편집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