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대 교양교재 『한국사회의 이해』가 11년만에 '이적표현물'의 굴레를 벗게 됐다. 11일 대법원 제2부(주심 김용담 대법관)는 지난 94년 국가보안법 상 고무·찬양 등의 혐의로 기소된 경상대 장상환(경제학), 정진상(사회학) 교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한국사회의 이해』가 △피고인들이 다른 교수들과 함께 개설한 교양과목 강좌의 강의안을 모아 발간한 서적이고 △주된 내용이 한국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한 것이지만 이와 함께 한국사회의 긍정적 경험과 발전의 잠재력도 언급하고 있으며 △명시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는 내용은 없고 △피고인들이 자신들의 학문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일환으로 제작, 반포한 것으로 학문의 자유 내지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어 재판부는 "명시적, 묵시적으로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선전활동에 동조하거나, 독점자본을 국유화하고 노동자계급의 폭력혁명을 통하여 사회주의를 실현하여야 한다는 등의 대한민국의 안전, 존립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내용이 없는 이상" 이 책을 이적표현물로 볼 수 없다며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로써 94년 7월 27일 경남경찰청 보안분실이 경상대 앞 '우리서점'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면서 시작된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이 11년만에 마녀사냥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 이에 앞서 2000년 1심 재판부였던 창원지법 형사합의3부(재판장 이재철)와 2002년 2심 재판부였던 부산고법 형사2부(재판장 김재형)가 같은 취지로 무죄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 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되었던 정 교수는 "당연한 판결이며 최종판결이 나와 후련하다"면서도 "기소권을 남용한 검찰 때문에 11년동안이나 마음고생을 해 한편으로는 분노가 식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공동집필자 중 한사람인 장 교수도 "이 사건 이후로 동료 교수들은 완성된 책의 출간을 보류하기도 했고 글을 쓰면서도 공안당국의 눈길을 의식하게 됐다"고 그동안의 고통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보안법의 위력을 실감하고 나니 악법의 폐지를 위해 연구자로서 더욱 분발하게 됐다"며 "시련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 셈"이라고 덧붙였다.
공안몰이의 희생양
이 사건은 94년 7월 북한 김일성 주석 조문파동과 함께 발생한 이른바 '신공안정국'의 공안몰이 가운데 발생해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공안당국의 폭거라는 지탄을 받은 바 있다. 당시 박홍 서강대 총장이 "북한에서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국내 대학교수가 된 사례가 있다"고 주장한 직후인 8월 2일 대검 공안부(부장 최환 검사장)는 『한국사회의 이해』가 계급투쟁을 부추기는 등 이적성이 있다며 내사중임을 밝혔다. 이어 빗발치는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대학당국이 '한국사회의 이해' 강의를 폐강하고 경찰이 출국금지와 함께 소환장을 발부하자 이 책의 공동 집필자들은 경상대 사회과학대 도서관에서 철야농성에 돌입하는 등 공안세력에 정면으로 맞섰다.
당시 상황에 대해 정 교수는 "김영삼 정부가 건 '개혁 드라이브'에 '복지부동'하던 수구 기득권 세력이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박홍 총장이라는 꼭두각시를 세워 반격을 결행한 것"이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민교협 등 지식인 단체가 총집결해 공안정국에 맞서는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하루빨리 악법이 폐지되어 국가권력이 권력을 남용할 수 있는 빌미를 아예 없애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단으로 돌아온 '이적표현물'
이번 판결로 사건 당시 폐강된 '한국사회의 이해' 강좌도 2학기부터 재개될 것으로 알려졌다. 정 교수는 "10년 넘게 지나 변화된 상황을 반영해 새로 강좌를 기획했고 기존 집필 팀을 보강해 교재집필에 착수하려 한다"며 "올해 9월이면 2005년판 『한국사회의 이해』를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일반인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보안법의 폐해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공소장과 판결문, 신문기사와 성명서, 공안문제연구소의 감정서와 학술단체의 의견서 등을 모아 『한국사회의 이해와 국가보안법』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을 준비하고 있다"며 "(대법 판결 이전에) 무죄판결을 확신해 대법 판결문만 추가하면 출간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밝혔다.
여전히 시대에 뒤쳐지는 대법원
한편 이번 대법 판결은 이적성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표현물의 내용이 국가보안법의 보호법익인 대한민국의 존립, 안전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것"이어야 하고, "표현물의 전체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그 작성의 동기는 물론 표현행위 자체의 태양 및 외부와의 관련사항, 표현행위 당시의 정황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결정하여야 한다"는 기존 대법원 판례(대법원 90도2033, 대법원 2003도604)를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특히 재판부는 "그 전체적인 내용이 학문의 중립성을 포기한 채 편향된 시각인 소위 사회과학의 한 방법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수용하고 이에 입각"했다며 '편향된 시각'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 상임활동가는 이번 판결을 환영하면서도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는 사법부 등 권력의 통제나 판단이 아니라 오직 양심에 따라 최대한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라며 "대법원이 적극적인 판례변경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판결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기존의 잘못된 판례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대법원의 한계를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또 그는 "94년 공안검찰의 행위로 인해 피해자들이 받은 손해에 대해 피해자들이 요구하기 전에 국가가 먼저 사과하고 피해를 배상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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