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기 인권위, 변화 시작됐다
최영도 인권위원장과 상임위원 등 주요 간부들과 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간담회는 인권정책, 차별조사, 인권침해조사, 교육협력 등 4개 분야별로 인권위가 주요 업무계획을 설명하고 논의 사항에 대한 인권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는 1기 인권위가 매년 의례적으로 이미 확정된 한해의 업무계획을 일방적으로 설명, 참가한 인권단체들을 대상화했던 '업무설명회' 방식과 대조를 이뤘다.
2기 인권위를 이끌고 있는 최영도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24일 취임사와 지난 1월 20일 인권단체와의 첫 간담회 자리에서 "인권단체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사업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집행, 평가에 이르기까지 인권단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연거푸 밝혀 기대를 모은 바 있다. 이날 간담회는 그 연장선상에서 마련된 첫 시험대였던 것.
쏟아진 과제들, 부족한 사전 소통
간담회에서는 광범위하고도 중요한 논의 과제들이 안건으로 쏟아져 나왔다. 인권정책 분야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 추진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권고안 수립 △인권상황 실태조사 과제 등이, 차별조사 분야에서는 △차별시정기구들의 인권위로의 통합에 따른 준비 △직권조사 활성화와 차별현장 방문 조사 등이 주요 논의 과제로 올랐다. 또 인권침해조사 분야에서는 △진정사건 처리업무 간소화 방안이, 교육협력 분야에서는 △인권단체 활동가 교육 지원 △인권교육 법제화 대응 방안 △학교 인권교육 활성화 방안 등이 주로 논의됐다.
그러나 각 분야별로 2시간 안팎 동안 방대하고도 굵직한 사안들이 안건으로 제출되다 보니 생산적이고 밀도있는 논의가 진행되지는 못했다. 불과 4일 전에 간담회 개최가 공고되고 3일 전에 논의 자료가 배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1기 인권위가 관련 정보를 적극 공개하고 민간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았던 사안들이 논의 과제로 오르다 보니 심도깊은 논의를 기대하기 역부족이었던 것.
한 예로 인권교육 분야에서는 현재 이원영 의원 등 세 명의 국회의원들이 각기 추진하고 있는 인권교육 관련 입법 사안이 논의 안건으로 제시됐다. 그러나, 법안의 주요 내용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권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도였다.
또한 인권정책 분야 간담회에서는 인권단체들이 인권위로 차별시정기구들이 통합되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주로 제출했던 반면, 차별조사 분야 간담회에서는 차별시정기구의 통합을 전제로 인권위 측에서 그 정당성을 역설하고 업무 변화를 설명해주는 위주로 논의가 진행됐다.
결국 보다 긴밀한 논의가 진행되고 인권단체들의 종합적인 의견이 수렴되기 위해서는 향후 관련 정보를 미리 공개하고 보다 숙성되고 긴밀한 의견이 오고갈 수 있는 자리가 지속적으로 마련될 필요성이 있는 것.
"이번 정책간담회는 시작일 뿐이다"
이러한 결과를 예상했던 듯, 최 위원장도 간담회 초입에서 "이번 정책간담회를 시작으로 인권단체들의 요구 사항을 수렴하여 주요 사안별 정책간담회로 전환하고, 실질적인 정책협의로 나아가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1기 인권위의 폐쇄성과 관료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권위원직을 사임했다 2기 신임 사무총장직을 맡은 곽노현 씨 역시 차별조사 분야 간담회가 끝날 즈음 "앞으로 보다 전문적이고 특화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간담회를 지속시켜 나가겠다"고 의지를 피력했다.
밑그림, 전략 함께 그려야
2001년 11월 출범과정에서부터 1기 인권위는 폐쇄적인 운영과 심판기능 중심주의, 인권단체 대상화 등의 오류를 범하면서 인권단체들로부터 지속적인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위와 인권단체들이 인권의 실현과 증진, 국가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라는 공동의 과제를 위해 밑그림부터 함께 그리고 전략적으로 공조해 나가는 모습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반면 2기 인권위는 사업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인권단체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협력함으로써 인권위의 책무를 제대로 이행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의지가 제대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관련 정보를 충실히 공유하고 △인권위가 필요할 때만 열리는 소통 통로가 아닌, 쌍방향적인 소통구조를 만들어내고 △정책간담회 등을 통해 수렴한 인권단체들의 의견을 실제 인권위의 행보에 반영해 나가는 것 등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서만 2기 인권위의 개혁 의지가 '눈가림용'이 아니라는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달 중순부터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권고안 수립과 관련한 세부 사안별 정책간담회가 연속 개최되기로 예정돼 있다. 인권위는 오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국가가 실행해야 할 인권정책과제를 정부에 제시하기 위해 6월 NAP 권고안 확정을 목표로 4월 중 인권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기초로 초안을 작성한 뒤 영역별 공청회를 개최하여 권고안을 수정보완할 예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NAP 정책 간담회는 2기 인권위의 인권단체와의 협력 의지가 시늉에 그칠지 아닐지 여부를 판가름할 실질적인 시험대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권위 구성원들, 인권감수성 길러야
한편, 인권침해조사 분야 간담회에서 시종일관 인권위의 고충만을 호소하던 한희원 인권침해조사국장이 조사관 확충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던 중, 조사관 한 명에 "여직원 한 명씩" 붙여서 일을 하면 업무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해 큰 반발을 낳았다. 결국 한 국장이 미온적이나마 사과를 하면서 상황이 일단 무마되기는 했지만, 인권위 간부들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인권감수성 교육이 절실함을 다시 한번 인식시키는 계기였다.
강연이나 워크숍 등 준비된 교육의 장도 있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인권단체들과의 지속적인 소통, 안팎에서 쏟아지는 비판에 대한 겸허한 수용이야말로 일상적인 교육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