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2002년 여수에서 HIV에 감염된 여성이 성매매를 하다 구속된 실제 사건을 극화한 작품이다. 당시 이 사건을 언론을 통해 접하면서 마녀사냥식 사실왜곡과 여론호도에 경악했던 나로서는 애초부터 이 영화를 편한 마음으로 볼 수는 없었다. 영화는 순박한 '농촌 총각'과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모르는 '다방 여종업원'의 슬픈 사랑과 이별, 그리고 사회의 편견에 대한 싸움을 나름대로 담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내 심기가 불편해진 건 여주인공의 감염사실이 드러나면서 사회의 편견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영화 후반부부터였다.
실제 사건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기자들이 몰려들면서 주인공들이 살던 지역은 에이즈 공포에 휩싸였다.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에이즈 검진을 받는 동네사람들, 여주인공과 성관계를 맺었을 거라 짐작되는 한 트럭의 군인들, 심지어 보건소 직원까지. 당시에도 그런 호들갑을 떨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영화는 지역주민들의 무지스러운 행동을 과장되게 그리기 시작했다. 실제 사건에서는 공포를 조장한 언론의 역할이 더 컸음에도 말이다.
여주인공을 그래도 사랑하며 같이 살겠다는 남주인공을 향해 "미쳤냐?"며 "에이즈는 당장 죽을 병"이라고 만류하는 보건소 의사는 의사로서의 자격이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몇 년 전부터 에이즈는 치료가 가능한 만성질병으로 진화하여 의료계에선 이미 만성질환으로 보고 있다. 감염인을 일선에서 관리한다는 의사의 입을 빌려 나온 이 말은 에이즈에 대한 감독의 무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겠다.
구속된 여주인공이 감옥에서 홀로 거울을 보다 피부에 붉은 반점들이 번지며 흉측한 몰골로 변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장면에서는 어느새 "지겨워"라는 말이 내 입속을 맴돌았다. 미디어들이 흔히 다루는 에이즈에 대한 잘못된 정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에이즈에 감염되면 피부에 나타나는 붉은 반점이다. 물론 서구의 HIV 감염인들은 체질 탓인지 그런 반점들이 간혹 나타나기도 하고, 아프리카 감염인들은 위생환경의 문제로 유독 피부질환에 시달린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 등 동양인들은 그런 붉은 반점들이 거의 안 나타나고 내가 본 많은 말기 환자들도 거의 그런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미디어들은 왜 그리도 HIV/AIDS 감염인들의 피부에 집착할까? 아마도 에이즈란 질병이 가지는 혐오스러움과 공포를 표현하는데 붉은 반점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에이즈에 대한 혐오스러운 상징이 그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 감염인들까지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감독은 모르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하다.
실화의 주인공들이 어떤 사랑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영화는 실화의 본질은 비켜간 채 단지 남성 중심의 사랑을 다루면서 "그래도 좋아"라는 동정심에만 초점이 맞춰져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다. 남주인공은 '에이즈까지도 받아들이는' 무한한 아량을 가진 사람이고 여주인공은 단지 그런 남성에게 '사랑받는' 대상일 뿐이다.
당시 실화의 주인공은 콘돔 사용을 거부한 남성 성매수자에 의한 피해 여성이었음에도 가해자로 몰려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성을 산 남성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남성들은 깨끗한(?) 몸을 제공하지 않았다며 그 여성에게 저주에 가까운 비난만을 퍼부었다. 누구하나 그 여성에게 사과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화 속의 두 주인공이 이 영화를 보며 어떤 기분이 들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의 그 악몽을 다시 떠올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덧붙임
윤한기 님은 에이즈인권모임 나누리+(aidsmove.org) 대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