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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영화를 만나다] 동성애라고 해도 '후회하지 않아'

<후회하지 않아>, 이송희일 감독, 2006

한 영화 기사를 봤다. 2006년 영화계의 트랜드는 ‘동성애’라는 기사다. 꽃미남 스타를 내세우며 1천만 관객을 넘어선 <왕의 남자>, 두 카우보이의 애절한 사랑과 미국 와이오밍주의 풍경을 잘 그려낸 <브로크백 마운틴>도 2006년에 관객을 찾았다. 게이들의 노년의 삶을 유쾌하게 그려낸 <메종 드 히미코>도 잔잔한 감동을 준 것으로 기억된다. 마지막으로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가 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고 영화계의 호평을 받으며 2006년의 대미를 장식했다. 동성애자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며 그 어느 때보다 영화에 관한 인터뷰를 많이 한 것 또한 예년과 달라진 점 중 하나다. 인터뷰 모두 마치 어디서 같은 질문을 뽑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동성애 영화의 성공이 한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고 할 정도였으니 2006년 동성애 관련 영화들이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한 듯하다.

영화 <후회하지 않아> 포스터

▲ 영화 <후회하지 않아> 포스터

‘후회하지 않아’

제목부터 마음에 든다. 영화 제목은 마치 그동안 후회를 많이 하며 살아왔던 나에게, 아니 한국의 동성애자들에게 충고를 하고 있는 듯하다. 당신의 삶을 인정하기까지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을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좀 더 당당해지라고, 후회하지 말라고 말이다. 대중가요 가사에나 나올 법한 알콩달콩 따뜻한 사랑을 영화 속에서는 찾기 힘들다. 영화 속 두 주인공, 수민과 재민은 둘만의 절박하고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이 둘은 후회하고도 남을 험난한 과정을 겪지만, 그들 사랑의 결론은 ‘후회하지 않아’이다. 영화는 통속적인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간다. 고아원에서 자랐지만 큰 쿰을 안고 서울로 상경해 낮에는 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밤에는 대리운전 기사로 열심히 살아가는 수민과 공장의 고용주, 대리운전 기사의 손님으로 수민을 만나 끝없이 구애를 하는 재민의 사랑이야기다. 계급적 차이는 둘 사이를 쉽게 가깝게 하지 못하게 한다. TV드라마에서 수도 없이 봐왔던 재벌2세와 가난뱅이 설정은 쉽게 ‘팔자를 바꾼다’는 신데렐라 코드로 연결되지는 못한다.

낯선 공간, 게이 호스트바와 찜질방

수민은 공장에서 해고당한 후 돈을 벌기 위해 게이 호스트바로 들어가고, 재민은 수민을 찾기 위해 게이 호스트바는 물론 게이들의 은밀한 공간까지도 찾아다닌다. 영화를 통해 일부 공개되는 게이들의 공간. 감독은 영화에서 게이들의 삶을 일부 투영하고 싶었던 듯하다. 상대의 이름과 얼굴을 잘 몰라도 은밀한 동의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곳. 아마 영화를 보며 적지 않은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도 있으리라. 게이들에게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더 했을 것이다. 그동안 동성애는 마치 이 사회에 던져진 혁명적인 도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문란’, ‘변태’라는 용어로 단죄되어 왔다.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곳, 공포의 질병이라고 불리는 에이즈라는 싹에 물을 주며 키워내는 곳. 이것이 게이들이 이용하는 공간에 붙여진 은유들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불편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그 불편함을 게이들의 삶의 방식의 문제로, 그리고 영화 속 신음소리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한 번쯤 이 사회구조의 문제로 돌려 생각해보길 바란다. 성애에 대해 억압적이고, 정상성만을 강요하는 사회는 그동안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을 단죄하고, 그들의 책임으로만 돌리려 한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하는 문제 또한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시켜버리고 모두 개인이 감내해야 한다. 사회는 비정상이라고 불리는 이들을 포용하려하기 보다 스스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정상성만을 유지하고 지켜내려고 한다.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그냥 그 ‘공간’이 문제다. 정상적인 섹스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오고가는 섹스의 공간이 게이들에게도 있다는 것이 그리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리고 게이들이 은밀한 곳에서 허탈한 섹스를 하는 것 역시 특별할 것도 없지만 이 공간은 언제나 문제였다. 재민이 수민을 찾기 위해 돌아다닌 찜질방과 그곳에서 흘러나온 신음소리는 이 사회에 무언가 말하고 싶은 울음소리와 같다. 감독이 게이들의 만남의 장소 중 하나로서 찜찔방을 보여준 것은 재민이 수민을 찾는 절박감을 더 극대화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수민과 재민이 만나는 영화 속 한 장면

▲ 수민과 재민이 만나는 영화 속 한 장면



가족, 현실, 사랑의 경계에서

고아원에서 자라 특별히 가족의 구속을 받지 않는 수민과 달리 재민의 주변에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약혼녀가 등장한다.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는 재민의 고백에 차갑게 대하는 어머니. 엘리베이터 안에서 재민이 가족들에게 수민이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또 재민의 성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들의 태도는 재민과 수민이 즐겁게 사랑을 나누는 장면도 오히려 위태로워 보이게 한다. 동성애자들에게 가족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하는 순간, 마치 살점 깊은 곳까지 도려내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 가족과의 갈등이 빚어내는 상처다. 이 부분이 영화에서 동성애자의 현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상처받는 사람은 가족과 나 자신일 뿐 사회는 이 문제에 대해 외면한다. 재민은 영화에서 유약한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가족에게 표현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용기있는 사람이 된다. 영화를 본 동성애자들은 아마 재민의 갈등을 보며 공감하고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후회하지 않아’ 난 그것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그치지 않길 바란다. 후회하지 않을 사랑과 인생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네 삶을 후회하게끔 만들고 있는 사회에 대한 도전이 필요하다. 하나의 트랜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 또 사회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인식되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동성애 영화의 성공이 한국사회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해 달라는 요청에 나의 대답은 항상 같다. “동성애 영화가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시대의 요청에 자연스럽게 부응한 것은 아니다. 지금 퀴어 영화가 한국 사회에서 인정받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여겨지기 위해서는 성애에 대한 이분법적인 구도를 변화시키려는 운동 또한 성장해야 한다.”
덧붙임

정욜 님은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