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진보’든 ‘인권’이든, 모토를 내거는 것은 사실 마케팅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일이다. 마케팅이 실상에 대해 아무런 보장을 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모토를 내거는 것도 아무런 보증이 되지 못한다. (또 하나의 가족인 삼성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반어적인 의미에서만 가능할 뿐.) 문제는 진보나 인권 같은 간판이 내걸리는 순간, 출발은 비록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고 할지라도 흔히 다음 순간에는 간판을 내세우는 주체의 자기자랑과 합리화를 넘어 자기기만까지 도달하기도 하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국가가 보장해야할 인권과의 격차는 도대체 얼마나 벌어져 있는가. 혹은 자유라는 간판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일은 사례수집하기에도 귀찮은 흔한 예일 뿐이다.
어떤 집단의 운동을 다루고 그 싸움과 진행과정을 강조하는 일반적인 독립다큐멘터리와는 달리, 이현정 감독의 <192-399 :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라는 영화는 긴 기간 동안 밀착해 있던 카메라를 통해 내부의 문제들을 비교적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영화 속 노숙인 공동체 ‘더불어사는집’만의 문제로 한정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샘플이나 지층의 단면처럼, 그 영화는 한국사회, 한국 운동진영에서 찾아보기 쉬운, 하지만 외면하기도 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운동이란 ‘사장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이어야 하겠지만, 실상은 운동을 한다고 하는 내부에서도 사장질을 하려고 드는 사람은 너무 많다. 그 소위 옛날 운동권들이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에 가있는 것이 이상할 게 없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노숙인 공동체 혹은 노숙인 운동이라는 모토를 내거는 것과는 달리 이 영화 속에서도 의사결정 과정은 비록 만장일치나 합의라는 간판을 달긴 했어도, 각자의 몫이 아닌 힘 있는 사람의 것이기 쉽다. 이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양고문’은 운동의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결코 노숙인이 아니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토로되어지는 불만처럼, 그는 자기 집에 살면서 공동주택에서 기거하지는 않지만 공동주택에 살고 있는 더불어사는집 사람들 일을 결정한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할 때 그 사람은 더불어사는집의 고문이었다가 영화가 거의 끝날 즈음에는 이사장이 된다. 그 사람은 “각을 세워야 한다”고 핏대를 올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윽박지르기도 하지만, 때때로 거기에 투항해 버리는 사람들도 “투쟁의 부속품으로 희생되고 싶지는 않아서” 더불어사는집을 떠나 버리기도 한다. 마치 해프닝처럼 등장하곤 하는 양고문의 자기 묘사들, “나는 세계가 인정하는 사람”이라든지, “나 같은 혁명가, 아니…” 등등은 차라리 순진하게 보일 정도이다. 더불어사는집을 찾아와 사람들에게 ‘변증법’을 가르치려 했던 사람이, 현관에 양고문이 등장하자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장면은 지극히 압축적이고 상징적이다.
영화 속 더불어사는집에서 이런 광경들이 벌어질 때 그 더불어사는집에 놓여 있던 TV에서 황우석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순간 황우석이, 죄가 있으면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겠다고 말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기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인권일 테고 사장 없는 세상에서 살겠다는 게 운동이겠지만, 진보든 운동이든 평등이건 자유건 간에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그것을 간판삼아 속이려 드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속는 사람도 많겠지만 결국 속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덧붙임
김경만 님은 인디다큐페스티발 2006 프로그래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