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를 통해 80년 5·18 민중항쟁을 다시 기억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5·18은 무엇이며 감독이 기억하는 5·18은 무엇인가. 5·18의 기억이 현재성을 갖는 부분은 무엇인가. 2007년 대선을 앞둔 시점이라 영화는 다시 한 번 보수정치권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거를 왜곡하려는 자와 과거를 되살리려는 자의 싸움이 되고 있다.
제목 ‘화려한 휴가’는 5·18민중투쟁의 진압과정에서 진행된 작전명이다. 이름만큼이나 참혹함이 화려하게 펼쳐졌던 군인들의 학살은 민중들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놓고 흔들어댔다. 감독이 말한 제목의 의미는 반어적이고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작전명이기도 하지만 소시민들이 모여 시민군이 되고, 시민들의 감정이 일치하여 사랑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소풍가는 순간 같은 기분이 드는 ‘화려한 휴가’일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감독은 5·18투쟁 기간 동안 짓밟힌 가족의 삶을 통해 5·18의 모습에 다가가려고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1980년 당시에 군인들의 총과 탱크를 앞세운 폭력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을 ‘폭도’라고 매도하였다. 모든 방송과 언론에서 민중들의 저항을 폭도와 간첩의 난동으로 말할 때 광주 민중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반민주적인 국가권력에 맞서 생존하기 위한 자신들의 저항을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래서 주인공 민우는 “폭도는 총을 버려라. 내려놓으면 살려주겠다”는 진압군의 말에서 사는 방향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폭도’로서 살아갈 수 없었기에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폭도는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며 그간의 싸움을 무로 돌리는 것이기에 “우리는 폭도가 아니야”라고 외치면서.
과거사 청산만이, 진실규명만이 기억을 회복시킬 것
영화에서 가장 큰 울림을 준 대사로 뽑는 대표적인 것은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와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이다. 앞서 말했듯이 기억은 과거의 연속이며 현재를 만들어 준다. 물론 시간은 사실을 흐리게 하고 기억은 그 위에 다른 색을 덧칠할 수 있기에 기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5·18광주항쟁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과거 사건의 진실을 밝힘으로써 다시는 국가 폭력에 의한 인권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진실 규명을 위한 시도는 1994년부터 광주항쟁 당시 피해자. 부상자. 유가족 등 3백여 명을 중심으로 고소고발운동으로 본격화되었다. "80년 5월의 시민학살은 12.12쿠데타를 일으킨 반란군들이 정권 탈취를 위해 자행한 범죄"라고 규탄한 이 운동은 1995년 7월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는 없다는 논리로 `전원 공소권 없음' 결정했을 때, 잠시 멈칫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5·18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5·18관련 책임자들의 실질적인 처벌은 없고 최초 발포 명령을 내린 자조차 밝혀내지 못 했다. 더구나 97년 진압군의 책임자로서 무기징역을 받았던 전두환은 단지 2년 만에 사면되어 버젓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결과 아직까지도 5·18진압을 명예롭게 생각하는 장성들이 존재하고 전두환을 기리는 ‘일해공원’을 추진하는 현실에서 진실은 망각의 강에 머물러 있음을 느낀다.
나아가 최근 이랜드 투쟁 등을 공권력이 ‘불법시위자’ 운운하며 탄압하는 현실에서, 80년 광주에 대한 진실규명은 부당한 권력 행사에 맞선 ‘민중의 저항권’이 권리라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 있기에 ‘진실규명과 과거사 청산’은 현재에도 소중한 것이 아닐까.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에 가려진 민중의 저항
영화에서 수 없이 등장하는 태극기는 어찌보면 당시의 모습-국가적 상징이 넘실거리고 그래서 애국심에 충만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폭력에 싸우다 쓰러져 가는 시민군들이, 시민들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장면은 민중의 투쟁이 ‘잘못된’ 국가에 맞선 싸움이 아닌 ‘이상적인, 그래서 추상적인’ 국가를 위한 싸움만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민중들은 권력에 맞서 싸우면서 서로에게 의존하며 투쟁의 정당성을 확인하며 광주시 전체를 자치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는 외국인 기자가 5·18당시를 찍었던 비디오에도 나온다. 민중들은 추상적인 국가의 ‘민주적’ 완성을 위해 싸운 것만이 아니다. 투쟁의 원천은 민중들의 자율적 연대였으며 국가는 시민들에게 폭력의 얼굴로 다가왔다.
군사독재정권의 폭력에 대응하는 시민군 대장이 전 공수부대 퇴역장교(박흥수) 라는 설정은 마치 5·18항쟁의 성격을 흐릴 뿐더러 ‘한국 군대’에 대한 잘못된 상을 그리게 한다. 사실 60년대부터 80년 광주까지, 아니 87년까지 한국의 군대는 ‘민중에게 폭력을 휘둘러온 국가권력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군 지휘부 등의 개별 개인들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또한 박흥수는 후배인 대위에게 “상급자에게 불신을 갖는 건 군인의 태도가 아니야”라는 대사에서 읽혀지는 군대 작동원리의 옹호는 광주 진압의 참상을 외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잘못된 명령에도 응할 수밖에 없는 군대이기에 수많은 양민들을 죽이지 않았는가.
왜 영화에서는 당시 끝까지 저항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노동자 출신 윤상봉이나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트럭운전사 출신 박남선을 리더로 하지 않았을까? 군에 대한 직접적 공격을 피하기 위해, “착한 군인”도 있다는 설정을 만들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러한 설정은 앞서도 말했듯이 5·18 항쟁을 진압한 군인들 중 “나쁜 군인”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오해로 낳을 수 있으며 군사주의의 씨앗이 될 수 있다.
투쟁의 힘, 민중들의 연대는 멜로에 가려지다.
5·18민중항쟁을 알거나 다큐멘터리를 본 사람들은 항쟁기간 5차례 열렸던 도청광장 범시민궐기대회가 나타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파리 꼼뮌’에 비견되는 당시 시민자치공동체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자치가 드러나는 장면은 영화에 없었다. 그래서 분출하는 민중들의 힘, 저항의 힘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려지지 않았다. 아직도 고등학교 때 성당에서 본 외신기자가 찍은 광주의 모습이 내 기억에 선명하다. 항쟁 기간 중 먹을 것이 없어지자 시민들이 나와서 먹을거리를 나누던 장면, 장사꾼조차도 자신이 팔던 과일과 먹을 것을 내놓으며 서로 나누어 먹는 장면은 내 기억 속에서 생생하기에 영화 속 광주민중항쟁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되뇌어 본다. 어쩌면 신애가 원했던 80년 광주에 대한 기억은 ‘국가’의 그늘을 넘어선 민중들의 저항과 연대를 현재에도 온전히 숨 쉬게 하는 것이지 않을까. 그래야 우리는 다시 ‘화려한 휴가’를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