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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사회운동포럼이 낳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가능성

“운동하는데 왜 이리 허전하냐”

[기획] 사회운동포럼이 낳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가능성 (8) 대토론회 2부 - 사회운동의 소통과 연대를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

부담 되는 자리였다. 껄끄럽고 불편한 얘기일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이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놔 줄까? 소통과 연대를 이야기하자고 모인 자리에서 외려 생채기만 헤집고 더 등을 돌리게 되면 어쩌나? 시쳇말로 ‘선수’들 모아놓으면 자기 고민을 소탈하게 얘기하기보다 밖을 향한 비판과 가르침만 잔뜩 늘어놓곤 하는데, 요런 모양새가 반복되면 어쩌나? 게다가 사회운동포럼이 소통, 연대, 변혁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사람들을 불러모았으니, 대토론 2부는 포럼이 정말로 내세운 깃발에 맞게끔 본판을 준비했는지, 모인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일렁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대 아닌가? 사회운동포럼 첫날 열리는 대토론 2부 사회를 맡아 판을 깔고 이야기손님을 모시는 내내 부담은 떠나지 않았다.

지난 8월 30일 열린 사회운동포럼의 대토론회 2부 토론자들 [출처] 사회운동포럼 홈페이지(www.smf.or.kr)

▲ 지난 8월 30일 열린 사회운동포럼의 대토론회 2부 토론자들 [출처] 사회운동포럼 홈페이지(www.smf.or.kr)



술자리 한탄을 토론장에 모셔오다

사회운동 안에서 소통이 안된다, 연대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온 지는 꽤나 오래됐다. “소외에 사무치다, 연설에 미치다, 변명을 외치다!” 사회운동포럼의 기치, ‘소통에 사무치다, 연대에 미치다, 변혁을 외치다’를 패러디한 한 참여자의 우스갯소리는 어쩌면 우리 운동이 서 있는 자리를 잘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소통과 연대를 가로막고 있는 지점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진전되지 못한 채 운동사회 주변을 맴돌았다. 이런 풍토부터 바꿔야 했다. 술자리에서 각자 푸념처럼 늘어놓고 성토하던 이야기를 귀한 손님으로 토론장으로 모셔와 운동의 중심 의제로 올려놔야 너덜너덜해진 소통과 연대에 새살이 돋게 만들 수 있으니까.

다행히 지역, 학생, 노동, 여성, 인권, 정당 등 각 영역운동에서 한가락씩 해온 토론자들은 이야기보따리를 한아름 싸들고 와 쌓아온 고민들을 토해냈다. 시계바늘이 밤 11시를 향해갈 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고 함께 해준 300여 참가자들의 뜨거운 마음도 전해져왔다. 그만큼 다들 답답하고 절박했던 것일까? 시원스레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니 가슴이 뻐근해지면서도 시끄럽던 속이 조금은 어루만져진 기분이었다.

너덜너덜해진 소통과 연대, 그만큼 초라한 운동

“여러분은 운동하면서 허전하고 외롭지 않나? 그것이 바로 우리 운동의 현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친구도 별로 없고 만나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물론 품앗이도 필요하지만, 눈도장 찍기식 연대에만 그쳐버리는 건 문제다. 우리 운동이 힘이 없으니 선수들끼리만 품 팔아주는 데 머무는 것 아닌가?”
“적과 싸우다 적을 닮아가는 꼴이다. 연대가 운동의 지향과 목적이 아니라 조직의 성과와 효율성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다 보니 자본주의를 닮아가는 운동이 되고 있다.”

먼저 소통과 연대가 서 있는 자리를 짚어보는 뼈아픈 지적으로 이야기의 물꼬가 터졌다. 운동하는 방식이 외톨이를 자처하는 방식이고 연대를 운동의 가치이자 과정으로 사고하기보다 특정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굳이 소통해야 할 이유도, 소통을 위해 품을 들이는 모습도 사라졌다는 얘기다.

지난 8월 30일 열린 사회운동포럼의 대토론회 2부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지난 8월 30일 열린 사회운동포럼의 대토론회 2부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소통과 연대를 가로막는 분할선들

이야기는 운동과 운동, 조직과 조직, 한 조직 안의 활동가와 활동가 사이를 갈라놓고 돌아서게 만드는 지점에 대한 좀더 세밀하고 치열한 진단으로 나아갔다.

본격적인 진단은 먼저 운동을 갈라놓는 ‘분할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논의로 시작됐다. 운동 안에 가로놓인 분할선들은 운동하는 사람들의 어깨를 움츠려들게 만들고 신뢰를 해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운동 안에서 페미니즘은 여전히 대안 이념의 핵심 원리로 받아들여지기보다 ‘저 여성들한테 찍히면 안되니까' 조심해야 하는 ‘앗 뜨거’ 정도나 어쩔 수 없이 이행해야 할 의무조항으로 인식된다. 피해여성에게는 씻기 힘든 상처로 남을 성폭력사건도 상대 정파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페미니즘이 없었더라면 내가 이 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한 여성활동가의 고백은 그래서 더 깊은 울림을 가져왔다. 소수자들의 존재는 염두에도 두지 않는 태도, 학생운동가를 몸짓패나 사수대 정도로만 생각하는 연령주의도 도마 위에 올랐다.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보지 않고 차이에 눈감은 운동은 누군가에겐 질식할 만한 운동 환경으로 다가갈 뿐 아니라, 반쪽짜리 대안사회도 만들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 운동은 이 지점을 운동의 과제로 받아안는 데 너무나 굼뜨다.

현장과 운동을 갈라놓고 서울을 중앙으로 패권화하는 분할선이 다음 도마 위에 올랐다. 삶의 현장, 지역 현장에서 긴 호흡으로 운동을 풀어나가는 모습이 부족하다, 현장에서부터 새로운 삶의 양식을 구성해나가는 과정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 활동가들이 광장이 아니라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있다, ‘중앙’의 지침이 없으면 지역 노조들이 지역의 중대 현안에도 잘 나서질 않는다, 서울 단체들 중심으로만 판을 짜는 국민운동본부 방식엔 지역운동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서울이 자기를 지역으로 인식하지 않고 ‘중앙’인 양 패권을 휘두른다와 같은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드는 지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민중들 속에서 운동이 추구하는 가치를 검증받고 실현하고자 했던 의지의 샘도, 뜨거운 현장 연대의 기억도 메말랐는데, 그런데도 현장과 멀어진 운동은 어깨에 힘만 잔뜩 주고 있다는 얘기다.

이야기의 무게가 차츰 현재 노조운동에 대한 비판으로 쏠렸다. 그러자, 힘겹게 건설한 민주노조가 조합원들의 실리주의에 끌려다니는 ‘자판기 노조’가 되어버린 현실에 피울음을 토하는 노조 활동가의 아픔과 조합원들이 작업장 안에 갇힐 수밖에 없는 현실 조건을 함께 봐야 한다는 조심스런 반론이 나왔다. 이에 대해 그런 상황은 인식하더라도 여러 의미에서 많은 권력을 가진 노조운동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이 과오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말고 더 낮아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뒤를 잇기도 했다.

운동을 말아먹는 운동, 담장 안에 갇힌 운동

잘못된 운동방식과 작별하고 운동의 본새를 바로잡아야 하는 문제도 다뤄졌다. 운동을 하다 보면 “저게 무슨 운동이야”, “운동이 저래선 안되는데…” 하며 한탄하고 걱정할 일들이 제법 많다. 운동이 현실의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거나 성과주의나 조직이기주의라는 함정에 빠져 본래 목적을 그르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 얘기다. 투쟁 현장에 나타나 자기 조직 깃발부터 앞세우고 투쟁의 성과를 한 조직의 회원 불리기로 낚아채려는 욕심, 이제 막 투쟁을 시작한 민중들이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운동을 개척해나갈 수 있도록 독려하기보다 다른 이들을 믿고 따르고 의존하게끔 만듦으로써 기존의 성별 권력관계나 직위에 따른 상하구조를 재생산하려는 태도 등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담장 안에 고립돼 각개약진하고 있는 운동간 담장 허물기도 제안됐다. 운동과 운동이 서로 형식적으로만 넘나들지 않고 자기 운동이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가 지닌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 실질적으로 넘나들어야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랜드 투쟁만 하더라도, 비정규 노동자들이 내건 요구를 보편적 의제로 만들기 위해 여러 운동이 어떻게 만나고 힘을 보탤 수 있는지 고민하고 실험하는 과정이 부족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서로의 운동에 대해 잘 모르고 운동마다 한 사안을 대하는 시각과 온도 차이가 분명 존재하는 만큼, 먼저 단절돼 온 대화를 다시금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담장을 넘어 만나야 할 이유도 분명해지고 만남이 신명날 수도 있을 것이다.

절박해지지 않으면 변화도 없다

다양한 측면에서 진단해 본 우리 운동의 현실은 한마디로 ‘운동이 운동답지 못하다’는 얘기였다. 불편하고 인정하기 싫지만, 고스란히 드러내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상처투성이 운동에 새살을 돋게 하는 처방책도 다양한 지점에서 제기됐다. 성찰하는 운동, 현장과 지역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조직되는 운동, 소통 능력을 키우는 데 공을 들이는 운동, 속도를 늦추고 장기적 전망과 전략 속에서 움직이고 연대하는 운동, 연대에 대한 새롭고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운동, 담장을 허물고 횡단하는 운동 등 토론자들이 제시한 변화의 열쇠말들은 다채로우면서도 서로 연결돼 있다. 성찰하고 소통할 줄 아는 활동가들과 지역/현장의 역동성이 만날 때 새로운 운동이 가능하고, 이를 위해서는 자기를 향해 먼저 거울을 비출 줄 아는 운동, 모순이 중첩된 현장으로 민중 곁으로 낮아지는 운동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럴 때, 뜨겁게 생동하는 소통과 연대의 새 모델이 만들어질 수 있다.

대토론 2부는 그렇게 쓰리고 무거운 이야기를 뻑적지근하게 털어놓은 자리였다. 때론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아프게, 때론 한바탕 웃음바다를 이룰 만큼 통쾌하게! 꼬아서 보면 ‘쯧쯧, 소통과 연대를 주제로 이야기마당을 열어야 할 만큼 운동 안에서 소통과 연대가 바닥을 치고 있는 셈이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다시 고쳐서 보면, 소통과 연대가 본격적인 이야기꺼리로 자리잡은 것만으로도 큰 변화가 시작된 건 아닐까. 그동안 이 이야기가 운동의 언저리에 머물러있었다면 그만큼 소통과 연대라는 화두를 절박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반증일 테니까. 절박해지지 않으면 변화의 물꼬를 틔울 수 없다. 꽉 막힌 소통, 팍팍한 연대가 아니라 현장에서 질퍽한 소통과 연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절실함에 불을 지펴야 한다. 소통과 연대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길러져야 하는 운동의 핵심 과제라는 새로운 인식에도 불을 지펴야 한다. 대토론 2부에서 오간 이야기들은 그 불을 지피는 풀무질이 된 셈이다. 이제 남은 몫은 그날의 문제의식을 우리 운동의 현재로 옮겨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