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4~25일 1박 2일동안 부산 영도 함지골 청소년수련원에서 <지역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네트워크 워크숍 ‘반차별 전국열차’>가 열렸다. 부산에는 매년 한 번씩은 가게 되지만 영도에 다시 오게 된 건 2011년 ‘희망버스’ 이후로 처음이었다. 영도 바다를 바라보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었는지 차별금지법제정 부산연대 활동가는 “영도에 오는 다른 지역 활동가들은 다 희망버스 이야기를 한다”며 웃었다. 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난 후에 다시 영도에 가게 된다면 ‘그때 지역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가들이 여기에 모였었지’ 떠올리게 될지. 지역 네트워크 워크숍은 그런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중간에 반갑게 모이고 만나는 정차역 같은 기회가 아닐까.
지역 네트워크, 운동의 성과
첫 번째 프로그램으로 가볍게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진 후에는(의외로 땀나는 시간이었다) 각 지역의 반차별 운동과 현재의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수련원의 큰 공간에 들어찬 전국의 반차별 운동의 활동가들의 모습은 그동안 차별금지법제정 운동의 성과가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2007년 반차별공동행동, 2011년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이후 차제연) 창립, 2017년 차제연 재출범으로까지 이어지는 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반차별 운동의 전국적 확산과 연대’가 아닐까 싶다. 2011년 차제연 창립 당시에도 지역과의 만남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자신의 차별경험이나 삶의 문제를 차별금지법과 연결 지을 수 있으려면, 차별금지법이 실효성 있는 제도로 작동하려면 서울지역 중심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차별금지법을 통해 반차별 운동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부산, 전주 등 지역단체와의 만남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기도 했지만, 이후의 활동 전망을 구체적으로 찾기 어렵거나 일상적인 연대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지속되지는 못했다. 당시의 특징은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지만 유사한 차별구조에 놓여있는 당사자 주체들, 운동들이 서로를 만나고 연대의 지평을 넓혀갔다는 점이다. ‘반차별’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지만 단순히 우산 아래 모여 있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 조건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더듬어 밝히는 과정이기도 했다.
2017년 재출범 이후 대구, 부산, 울산, 인천, 수원, 광주, 전북, 충남, 충북, 등 지역 차제연이나 반차별 운동 단위들이 조직되고 차별금지법에 대한 대중캠페인, 토론회 및 교육, 반차별 담론의 생산과 반차별 연대 조직까지 다양한 활동을 해 나갈 수 있는 현재의 기반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의 전망과 과제’ 시간에 이종걸, 미류 활동가가 짚은 것처럼, 2017년 박근혜 퇴진 촛불 이후 불평등과 차별을 향한 사람들의 분노는 정권 퇴진을 외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소수자의 이름으로 다시 쓰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은 ‘소수자 운동’(만)의 과제라는 인식을 넘어서야 한다는 반차별 운동의 토대 위에서, 여성/성소수자/이주민 등 소수자 집단이 혐오의 전선에 서게 된 상황에 맞서서, 차별금지법제정을 통해 평등에 대한 요구를 적극적으로 가시화하고자 한 연대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2018년 ‘지방선거 혐오대응 전국네트워크’, ‘#차별금지법_방방곡곡 캠페인’, 국회를 향해 이어졌던 ‘평등행진, 우리가 간다!’ 등의 활동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벌어진 조례 대응 활동들의 경험은 각 지역의 반차별 운동에 기반한 연대의 필요성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경험한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불평등을 지나쳐버리지 않는 힘
조례의 수난시대라고 불릴 만하다. 아니, 인권, 성평등, 민주주의, 노동, 문화다양성의 수난시대라고 해야 할까? 광주광역시 학생인권조례의 성적지향 조항에 대한 무효소송, 부천시의회 문화다양성 조례의 철회, 충남도의회의 인권조례 폐지에 이은 충북 증평군의회 인권조례 폐지 결정, 울산시 노동인권교육 진흥조례와 학교민주시민교육 진흥조례의 안건 상정 유보, 그리고 경기도 성평등 조례 개정안 및 성인지 조례안 원안 가결 후에 벌어지고 있는 재의 요구까지. 전국 각지에서 보수기독교·혐오선동세력의 집요한 제정 방해와 폭력적인 개정·폐지 요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연 2007년 ‘누더기 차별금지법 사태’의 연장선상에 있다. 인권의 기본법이라고 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며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할 권리를 달라 주장했던 사람들은 더 세를 불렸다. 이제 인권과 성평등, 민주주의라는 말의 존재 자체가 한국사회 분열의 원인인 듯 주장하며 인권이 발붙일 곳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 떠돌아다니고 있다.
광주학생인권조례 개정/폐지 요구에 문제제기하며 만들어진 광주 혐오문화대응네트워크나 충남인권조례 폐지 이후 재제정 되는 상황을 대응하며 발족한 충남 자체연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현재 대부분의 지역 자체연은 각종 인권조례 개정 혹은 폐지 움직임과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반대를 겪으면서 혐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공통적인 고민 앞에 놓여 있다. 혐오세력이 공적 영역에서 목소리를 더욱 키워가는 상황에서 2019년 하반기에 진행될 평등행진과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어떤 전략으로 움직여야 하는지는 이번 워크숍에서도 주요한 토론주제가 되었다. 이주민/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더욱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총선 대응을 선제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 혐오세력이 성소수자 당사자를 문제 삼을 때 성소수자 국토대장정과 같은 아이디어로 당사자의 가시화와 연대의 힘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 지자체가 몸을 사릴 때 부산퀴어문화축제가 취소되었어도 퀴어총궐기를 진행하기로 한 것처럼 우리 스스로가 다양한 형태의 저항과 액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 등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전망과 과제에 대한 토론을 마치고 각 모둠별 발표를 들으면서 혐오세력에 의한 차별의 목소리가 거세다지만, 불평등을 지나쳐버리지 않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힘은 평소에는 너무 과소평가되거나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워크숍처럼 꼭 ‘바로 지금’이 아니라 각 지역/전국 차제연의 활동 역사와 경험을 짚어가다 보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싸워왔는지,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알게 되고, 평등을 상상하고 외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알게 된다.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이 소수자 운동만의 의제가 아니라는 것을 설득하면서 소수자의 열린 연대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격량 같은 혐오가 덮치는 듯한 현재도 잘 돌파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순진한 희망이 아니라, 혼자가 아니라는 우리의 운동 조건이 있기 때문에.
영역을 가로지르는 운동 만들기
혐오선동세력에 의한 전국적이고 전방위적인 공격은 역설적으로 소수자들이 놓여 있는 차별의 구조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어떤 가치가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반차별 활동가들에게는 서로의 운동의 차이를 좀 더 솔직하게 드러내면서도 어떻게 운동과 운동의 연대를 활발하게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남겨주기도 했다. 이제는 ‘교차성’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지만 각 지역의 고민 속에서, 서로 각자의 영역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차별을 이해하고 귀 기울일 수 있는 구체적인 경험의 필요성과 함께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차이를 녹여내려는 일상적인 노력의 필요성이 논의되었다. 또한 지역에서도 각자 단위의 운동 과제가 있고 그 활동만으로도 벅찬 상태가 되기도 하다 보니, 반차별/차별금지법제정 운동이 당위로써만이 아니라 보편적 인권 운동으로서 이루어지기 위한 운동의 조건에 대한 고민 또한 나눌 수 있었다.
언제나 고민이 끝나지 않는 주제들이지만, 위 논의들을 함께 하며 ‘아, 이래서 여기에 다 함께 모여있구나’ 싶기도 했다. 차이들을 좀 더 솔직하게 드러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반차별 운동의 관계와 연대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여전히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는 우리의 중요한 방법이자 우리 스스로를 독려하고 희망을 불어넣는 전략이라는 점이 이번 ‘반차별 전국열차’ 워크숍에서 가장 마음에 남아 있다.
그나저나… ‘반차별 활동가 대회’를 하자는 의견에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머리를 쥐어뜯기도 했는데, 언젠가 제1회 반차별 활동가 대회를 하게 되면 그 시작이 부산 영도였다고 다들 기억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