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주> 지난 11월 14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유서의 필적이 김기설의 필적과 동일하다고 결론지었다. <인권오름>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배경과 경과, 남은 과제를 살펴본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 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그것은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머지않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막 가장 멀리까지 울려 퍼질 재앙 중의 재앙을 준비했다는 것을." (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 중에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1991년 5월 한 청년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다. 그는 그 후 3년 2개월 동안을 감옥에 있어야 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6년 6개월이 지나서, 지난 11월 14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에 대해서 “김기설의 필적과 유서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국가는 종전 국과수의 필적감정, 기소 및 유죄판결에 대해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또 확정판결에 대해서는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할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이런 결정을 하기까지에는 당시 사건의 유일한 증거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아래 국과수)의 감정결과를 그들이 스스로 뒤집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의 감정은 김형영 당시 국과수 문서분석실장이 혼자 한 것이었고, 공동감정은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일종의 ‘고백’을 한 것이다. 거기에다 7곳의 사설감정소 감정결과도 유서는 김기설의 필적이며, 강기훈의 필적이 아니라는 것으로 동일하게 나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강기훈, 같은 운동단체에서 한 사무실을 쓰며 같이 운동하던 동료가 자살을 하는 것을 유서를 대필해주며 방조하였다는 패륜아로 몰렸던 장본인이다. 그는 자신의 자식들에게만은 떳떳하게 애비의 진실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렇지만 ‘유서대필 조작사건’이라 불리는 그 사건이 그에게만 억울하고 불명예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는 당시의 민주화 운동진영이 동시에 불명예를 안아야 했다. 혁명을 위해서는, 운동을 위해서는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게 ‘운동권’이라는 강한 인식을 심어주었던 사건이 ‘유서대필 조작사건’이었다.
강기훈은 자살방조 혐의로 구속되었고, 법원의 확정판결에서도 그의 혐의는 인정되었다. 1심, 2심, 대법원의 한국 사법제도가 보장하는 모든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그는 시종일관 무죄를 주장했지만 법원은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은 강기훈을 천인공노할 패륜적 범죄자로 낙인을 찍은 뒤에 가장 심각했던 정치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이미 ‘수서비리 의혹사건’을 비롯한 각종 비리사건으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고 있었다. 만약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없었다면 1991년 5월 강경대 열사의 죽음으로 발발한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최대의 반정부 시위는 다시 노태우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화운동을 상승시켰을 지도 모른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리는 ‘유서대필 조작사건’, 드레퓌스는 12년 만에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했다고 하지만,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진실규명과 강기훈의 명예회복은 이제부터다.
처참했던 1991년 5월
강기훈의 동료 김기설이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 후 투신한 것은 1991년 5월 8일 오전 8시 7분경이었다. 그해 4월 26일 명지대 새내기 강경대가 학교 시위에 참가했다가 학교 앞에서 백골단(전경 중 사복체포조)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뒤, 4월 전남대생 박승희가 분신해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연이어 안동대 김영균, 경원대 천세용 학생이 노태우 정권 타도를 주장하며 분신했다. 그리고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 서울구치소에서 수감 중이었던 박창수 씨가 안양병원에서 의문사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은 5월 6일이었다.
학생과 노동자의 연이은 목숨을 건 항거와 의문사는 노태우 정권을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런 죽음의 행렬은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불러온 김기설의 분신으로 이어졌고, 이후에도 노동자와 학생들이 계속 분신하였고, 5월 25일 성균관대 김귀정 학생이 범국민대회에 나갔다가 경찰의 토끼몰이 진압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최대의 인파를 거리로 불러 모았다. 그 시기 60일 동안 분신, 투신, 의문사로 죽어간 이들은 13명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은 6월초 외국어대 학생들이 당시 정원식 문교부(현 교육인적자원부)장관에게 밀가루 세례를 퍼부어 여론의 지탄의 대상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대중투쟁의 열기는 정권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공안세력의 유서대필 조작과정을 통해서 점차 식어갔다. 1991년 5월 투쟁의 열기가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터지면서 사실상 식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참혹했던 5월의 한 복판에서 당시의 민주화운동세력들은 ‘고 강경대 열사 살인폭력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로 결집했다. 노태우 정권은 6월항쟁 이후 분출하던 민주화운동, 노동자 등의 생존권 확보투쟁 등에 대해서 공안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하고, 대대적인 탄압으로 대처하면서 5공 청산과 광주 민중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를 억누르려고 했다. 또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을 결성하면서 1988년 이후 총선을 통해 국민들이 선택한 여소야대 정치지형을 인위적으로 변경했다. 민자당은 1990년 초 5공의 주체였던 민정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결성된 정당이었고, 이후 민자당의 총재가 된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기에 이를 것이었다(이로써 야당은 김대중이 총재로 있던 평화민주당만 남게 된다). 1991년 5월의 저항은 이런 노태우 정권의 반민주, 반인권적 정책과 탄압에 대한 저항이었다. 노태우 정권이 강경대 학생을 사망에 이르게 하자 절박한 상황인식이 운동사회에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6월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세력이 총결집되어 정권 타도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김지하와 박홍
이런 정권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기획이 정권 차원에서 마련되었으니 그것은 민주화운동세력의 도덕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분신이 이어지자 보수세력들 사이에서는 운동권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분신자를 선택한다느니, 배후가 있다느니 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5월 5일 시인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집어치워라!”면서 분신을 민주화운동세력들이 이용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런 가운데서 마침 김기설이 5월 8일 아침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한 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박홍 서강대 총장(신부인 그는 이후 ‘김정일 장학생 발언’ 등을 하면서 운동세력을 친북세력으로 몰아가는데 크게 기여한다)은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성경에 손을 얹고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어둠의 세력이 있다. 죽음의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근거 없는 선동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자 검찰은 이에 발맞추어 “분신자살은 2~3일 간격으로 연쇄 발생할 뿐만 아니라 한적한 곳에서 하는 등 방법이 유사하고, 지역적으로는 호남, 영남, 경기, 서울 등 분포를 이루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배후에서 조직적으로 이를 부추기는 세력이 있을 것”이라며 적극적인 수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힌다. 당시 정구영 검찰총장은 전재기 서울지검장, 강신욱 강력부 부장검사 등 6명으로 전담 조사반을 편성하여 김기설의 분신 사건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이런 상황을 극대화시킨 것은 언론들의 보도태도였다. 언론들은 “김기설의 분신 장소에 하얀 점퍼를 입은 사람 등 2~3명이 더 있는 것을 본 목격자가 나타났다”, “시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운동권에서 내부적으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자살을 기도한다는 소문이 있다”는 검찰의 발표를 거르지 않고 그대로 보도했다. 한 술 더 떠서 “재야에 자살 특공대가 있다는 풍설이 오래 전부터 나돌았다”, “분신에 협력자가 있었을까?”, “분신자살조, 사실일까?” 등 선동적으로 김기설 사건을 그려나갔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김기설의 유서가 누군가에 의해서 대필되었으며, 그런 자살의 배후세력에 대해서 단죄해야 한다는 논조가 소수의 언론을 제외하고 이어졌다.
이런 보수세력의 비상식적인 총반격에 대해 범국민대책위를 비롯해 운동사회는 분신을 자제하고, ‘살아서’ 노태우 정권 투쟁에 나설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면서 강경대 열사 장례투쟁, 백골단 해체의 날, 노태우 정권 퇴진 범국민대회 등을 조직해 나갔지만, 그런 과정에서도 분신은 이어졌다. 김기설이 분신하여 운명한 지 이틀 뒤인 5월 10일 노동자 윤용하는 전남대 병원에서 “누가 분신을 배후 조정한단 말인가, 노태우는 퇴진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다시 분신하기에 이른다.
검찰의 예단, 강기훈을 배후로 지목하다
"1991. 4. 27.경부터 같은 해 5. 8.까지 사이의 일자 불상경 서울 이하 불상지에서…김기설의 명의의 유서 2매를 작성함에 있어, 김기설은…고등학교 1학년을 중퇴한 학력의 소유자로 지식과 문장력이 부족함에도 피고인의 지식과 문장력을 이용…유서를 작성하여 줌으로써…김기설의 분신자살 결심과 결행을 용이하게 도와주어…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한 것이다."
위 인용문은 이른바 '유서대필 조작사건'에 대한 검찰 공소장의 일부다. 여기서 ‘김기설’은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전신, 아래 전민련) 사회국에서 활동했고, '피고인'은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을 일컫는다. 검찰에 따르면 강기훈은 "목적을 위해서는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좌경혁명분자"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게 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앞에서 보았듯이 검찰은 이 사건에 대해서 처음부터 사건의 배후가 있다는 단정 하에서 수사를 시작하게 된다. 김기설이 분신하기 하루 전인 5월 7일 청와대 고위 당정회의와 그의 분신 당일인 5월 8일 오전 7시 30분에 있었던 청와대의 치안관계장관회의에서 분신 배후에 대해 철저히 수사를 해야 한다는 결정을 했다. 마침 발생한 김기설의 분신 사건은 검찰에게는 분신이 조직적으로 진행되며, 분신의 배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좋은 소재가 되었다. 검찰은 공안부서에 이 사건을 배정하지 않고, 마약범들을 잡아들이던 서울지검 강력부에 이 사건을 담당하게 한다. 이로부터 검찰은 이전까지 안기부(현 국정원)를 비롯한 공안기관들의 기획에 의해 조정을 받는 입장(‘권력의 시녀’)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공안정국을 주도하는 주체(‘권력의 주구’)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는 6공화국 이후 ‘검찰 공화국’의 서막을 여는 것이었다.
검찰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분신의 배후가 있다는 전제 하에 김기설의 필적을 확보하기 위해 김 씨의 주민등록상의 집(안양시 호계동)이나 동사무소에까지 가서 필적을 입수하게 된다. 그리고 호계동 집에 대해서도 압수수색을 하여 가족들로부터 모든 필적을 수집해갔다. 그런데 검찰은 김 씨의 집에서 필적을 입수하지 못했다고 발뺌하게 되지만 훗날 가족들은 검찰이 첫날 집에서 필적을 압수해 갔음을 증언했다. 검찰은 또 5월 13일에 김 씨가 근무했던 군부대에 찾아가서 필적을 입수했다.
이와 같은 검찰의 태도는 김 씨의 유서가 대필되었다는 예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이와 같이 필적부터 수집하는 것으로 수사를 시작하는 것은 미리 김 씨 필적이 대필되었을 것이라는 판단이 없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뒤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검찰의 태도는 계속 이어진다. 이후에도 검찰은 김 씨의 행적을 따라 필적을 입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김 씨가 사망 직전에 머물렀던 여관 숙박부에 남긴 필적을 입수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가장 사망에 가까운 시기에 작성한 전민련 수첩과 같은 필적에 대해서는 손쉽게 조작되었다는 판단을 내려 버리고, 대부분의 필적들은 은폐하였다. 그래서 검찰은 이후 국과수에 강 씨가 학생운동 시절 구속되면서 작성한 진술서 등을 유서와 비교하여 감정하도록 의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검찰이 의도를 갖고 유서와 비슷한 필적만을 감정 대상으로 의뢰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말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전민련에서 작성한 업무일지를 국과수에 감정 의뢰한 결과 국과수는 이 업무일지가 강 씨가 작성한 것으로 유서의 필적과 동일한 것으로 판단했다. 또 검찰이 의뢰한 강 씨의 1985년도 시국사건으로 구속될 당시의 자술서 필적도 유서와 동일하다고 결론지었다. 결국 이렇게 되면 유서와 업무일지는 강 씨가 조작하여 작성한 것으로 된다. 이에 따라 검찰은 “업무일지를 조작하기 위해 유서를 대필한 자가 급하게 써 내려갔다.”고 강 씨를 추궁하게 된다.
그렇지만 검찰에서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채 신문을 받던 강 씨가 이 업무일지에 김기설 씨의 필적이 대부분이지만 다른 사람의 필적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사결과 업무일지는 김기설, 임무영, 이동진 등 세 사람의 전민련 활동가들의 글씨가 섞여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자 검찰은 강 씨를 유서대필자로 지목하여 구속까지 한 마당에 방향을 급선회하여 임무영을 체포하여 7월 6일부터 9일까지 잠 안 재우기 고문, 구타 등 가혹행위를 하면서 집중 추궁했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7월 9일부터 강 씨에게 다시 유서를 대필했음을 자백하라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이처럼 검찰이 강 씨를 유서 대필자로 몰아가는 데는 91년 5월 투쟁에 찬물을 붓기 위해 사실마저 조작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