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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디카로 물구나무

여권에 나타난 국제기준(?)

[디카로 물구나무]

전자여권이 8월부터 만들어진다기에 여권만료 기한이 1년 남았지만 10년짜리 새 여권을 만들러 갔다. 평일 아침이라 출근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가까운 구청에 가서 여권신청서를 작성했다. 작성한 여권신청서를 직원에게 주었더니 남편 성을 왜 쓰지 않았냐며, 예전 여권에는 남편 성이 들어갔으니 쓰라고 한다. 안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했더니 '빼는 이유에 대한 서류' 작성을 해주면 된다고 하였다. 다시 서류를 작성하려하니까 약간 귀찮은 마음이 들었고, 출근 시간이 신경 쓰여 여권신청서에 남편 성을 기입했다. 그런데 며칠 후 새로 발급된 여권을 보고 매우 놀랐다. 나의 성 옆 괄호 안에 ‘누구의 아내'라고 기입되어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옛날 여권에는 w.o.chong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wife of chong이라고 바뀌었다.



여권을 통해 내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의 결혼여부를 알게 되고 누군가의 아내로 인식되는 것이 나는 불편하다. 호주제도가 폐지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아직 국가신분증에 결혼한 여성의 경우 남편의 성이 기입되는 것은 여전히 여성이 누군가의 아내로 어느 집안의 며느리로 남을 수밖에 없는 가부장의 잔재를 확인하는 거 같아 씁쓸했다. 기혼 여성은 왜 ‘누구의 아내’로 존재가 분명해진다고 생각할까? 기혼 남성에게 ‘누구의 남편’이라는 기재는 없지 않는가? 내가 결혼했는지 여부를 왜 모르는 많은 사람들(예를 들면 출입국 심사국)에게 알려야 하는가? 또한 결혼 여부와 같은 개인 정보가 내 의지와 무관하게 공개되어야 하는가?

남편의 성은 왜 쓰나
여권을 받아들고 나서 구청 여권과로 전화했다. 여권이 불필요하게 개인정보를 많이 노출하고 있으며, 여권을 만드는 과정에서 달라진 점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냐고 항의했다. 그런데 구청직원은 국제기준인데 왜 그러냐며 뭐가 문제냐고 되묻는다. 이명박 정권에서는 ‘국제기준’이면 모든 것이 ‘OK’ 라는 식이다. 다른 구청에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해보니 여권발급 업무와 관련해 결혼한 여성의 경우 남편 성을 쓰는 규정은 없다고 한다. 물론 여권기입에 관한 기준을 다룬 국제기준도 없다고 한다. 결혼한 여성의 경우 자신의 이름 옆에 남편 성을 써도 되고 안 써도 된다. 다만 결혼한 여성의 경우 남편의 성을 쓰지 않으면 미국 비자를 받을 때 왜 성이 다른지 해명하고 서류작성을 별도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청직원이 이러한 설명을 해주었다면 시간을 내서라도 변경신고서를 작성했을 것이다. 아마도 구청직원은 관례나 관행에 따라 나의 사례를 다룬 것 같다.

왜 여권신청서에는 필요한 정보 외에도 많은 것을 기입해야 하는 걸까? 왜 국가는 개인사를 낱낱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서류를 만드는가? 개인정보 기록이 최소한 필요한 내용만 기입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서류가 작성되었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권을 보장하는 시스템도 필요하지만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인권의식도 중요하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공적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개인정보 보호와 여성인권 증진을 위한 안내자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임

* 명숙,승은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