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잡소리’ 님(이하 오만)을 만나 촛불 1주년에 대한 감회를 물었다. 그녀는 2008년 광우병쇠고기수입반대 촛불집회 중 연행을 당했다. 작년에는 인터넷 ‘촛불연행자모임’의 운영진으로 활동했다.
집회, “별다른 게 아니더라”
촛불과 함께한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오만의 일상은 많이 달라졌다.
“싹 바뀌었어요. 휴대폰에 저장된 지인들 번호만 해도 촛불 분들이 3분의 1이에요. 인간관계도 많이 바뀌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받아들이는 느낌도 변한 것 같아요. 지금은 어떤 사건이 생기면 누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의문이 생겨요. 관심이나 관찰력과 사고력이 깊어지고 확장된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공부를 준비하려던 과정에서 집회에 나오게 되고, 그 과정에서 연행이 되고, 그러다보니까 지속적으로 참여를 하게 됐어요. 얼마 안 있으면 결혼인데 생업을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오만은 사회문제에 관심은 있었지만 중립적·관망적 자세의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촛불집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주장도 더 확고할 것 같고 집회의 모양새가 훨씬 강하고 투쟁적일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작년 5월 2일 처음으로 나가보니까 이게 별다른 게 아닌 거에요. 내가 평소 생각해왔던 집회나 시위의 개념이나 이미지가 한 순간에 달라진 거죠.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지켜달라는 당연하고 기본적인 요구, 그 뜻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초 한 자루 켜고, 다들 밝은 모습으로 평화적인 집회를 하고 있는 걸 보면서 이렇게 자신의 뜻을 주장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집회가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했죠.”
사실 집회와 시위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권리를 표현하는 수단이고 일상을 살아가는 한 방식이다.
그녀가 경찰을 만났을 때
“전경들이 도로를 안방 뛰어다니듯 하고 시민들을 겁주고 방패로 찍고 다니는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죠. 차도고 인도고 전경들이 다 막아놨으니 기자와 고등학생들도 지나갈 길이 없어 같이 전경들 방패에 갇히기까지 했어요. 실랑이해서 다시 인도로 길을 터주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끝에 경찰차량이 있었고 거기에 타라고 하더라고요.”
오만은 처음 연행됐을 때를 상기했다. ‘어이없고 폭력적인’ 연행이었다.
“미란다고지도 없었고, 어떤 근거로 잡아가는지 묻고 항의해도 대꾸도 없었어요. 연행과정에서 한 여성은 신장 치료를 위한 관이 빠져서 피도 났어요. 그 여성분이 아파서 땀을 뻘뻘 흘리고 고통을 호소하고, 사람들이 병원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하는데도 쳐다보지도 않더라고요. 결국 유치장까지 가서 상태가 심각해지니까 담날에야 병원으로 보내줬어요.”
그녀는 경찰이 정당한 공무집행을 하는 것인지, 그들이 직업윤리정신은 가지고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비상식적인 태도의 경찰을 만날 때마다 그 의문들은 지속되었다.
“경찰조사과정에서도 ‘집회 왜 나갔냐, 또 집회 나갈거냐, 뭔지나 알고나갔냐, 부모들 아시냐’, 그 유명한 ‘아고라 회원이냐’는 질문은 기본이고, 필요한 질문만하면 될 것을 상당히 소모적인 말들, 폭언, 말도 안 되는 설교까지 하면서 인권을 침해하는 발언들을 무수하게 해요. 결국 개인에게 있는 사상의 자유, 이런 거까지 다 침해하는 거죠.”
연행과 수사과정에서 경찰은 개인의 신체와 사생활, 사상과 표현, 저항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개인의 영역을 침범할 어떤 명분도 없다.
“타협하고 순응할 수는 없지 않을까?”
오만이 속한 촛불연행자모임은 ‘벌금납부거부운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연행 당하신 분들 위주로, 연행 당했을 때 애로사항이나 민변과의 연결 문제라든지 (이런 걸 원활히 하려고) 우리끼리라도 힘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에 까페가 만들어지고 모였죠. 그 와중에 정말 검찰이 우리를 기소하고 벌금을 날리니까 여기에 굴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 벌금 나온 분 대부분이 ‘벌금 한 푼도 낼 수 없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이런 식으로라면 앞으로 계속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서 탄압받는 사람들이 생길 거다.’라는 생각에 내외부적으로 의견을 모으고 활동하게 됐어요. 벌금을 내버리면 우리가 초를 들고 각종 문화제와 집회에 참여한 일이 저들의 논리대로 폭력시위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비춰지지 않겠어요. 우리는 기본권을 지켜달라는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권리를 주창하러 나갔던 것뿐이고, 그 과정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타협하고 순응할 수는 없지 않을까라는 반발심이 컸어요.”
그녀는 작년 촛불연행자모임의 벌금납부거부운동 여론화로 검찰과 경찰이 약간 위축된 것 같았을 때는 뿌듯함을 느꼈다고 했다. 계속 싸워나가면 저들도 언젠가는 무릎을 꿇거나 수세에 몰리는 존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자신감도 생겼다.
우린 인간적인 싸움을 했어요
오만은 지금도 그들과 싸우고 있다. 시민들의 합리적·보편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가 집회 시위의 자유와 개인을 억압하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확연히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꼭 바꿔나가야 하고 고쳐나가야 되지 않을까요. 현상이 좀 옅어지면 저도 무덤덤해질 수 있는데, 더 심해지니까 포기가 안 되는 거죠. 만약 우리가 열 개의 주장을 했다면 한 두 개라도 관철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나를 비롯해서 우리 가족, 자라나는 아이들한테도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책임감? 이 정권에서 1년 동안 싸워서 이뤄진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더욱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든 우리의 권리를 지키고 적극적으로 맞서려고요.”
국가권력을 마주치면서, ‘오만과 잡소리’는 ‘평범한 일반 시민’에서 자의반 타의반 ‘전문시위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집회와 시위는 ‘전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매우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것이다.
“현장에 나가서 나와 같은 촛불들이나 시민들을 만나 뵙고 그들과 같이 호흡하다 보면 이게 전혀 폭력적이고 이기적이고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는 위안을 얻고 확인하게 되요.”
비인간적인 국가권력
“지난 연말에 광주 시내를 행진한 적이 있어요. 맞은편에서 지나가는 차량이 집회시위대에 항의하는데, 광주경찰은 오히려 그 분을 설득시키고 우리의 행렬을 보호해주더라고요. 서울에서 내려간 대학생이, 웃으면서 ‘왜 우리를 지켜주느냐, 우리가 뉴라이트 같다’라고 말했을 정도에요.”
오만이 겪었던 광주에서의 기억을 서울 도심에서 재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현 정권이 국민에 대한 태도만 고치면 말이다. 그녀에게 이 나라는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나라’다. 국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그 자유와 권리를 제압하려는 나라.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나라.
“얼마 전에도 지하철이 (시청에서) 무정차를 하고, 시민들 시청역 밖으로 못나가게 차단막 내려 가둬놓고....... 얼마나 명분이 없고 정당하지 못한지는 그들의 (행동) 수위를 보면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공정 법조항, 집행만으로 집회와 시위를 저지할 수 없는 모호함과 부당함이 존재하니까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그녀의 말처럼 ‘그들의 수위’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각종 집회 시위에서 경찰에 연행된 사람의 수가 2,700명을 넘어서고 있다. 그들이 시민의 안녕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정부와 경찰이라면, 누굴 위해 존재하는지부터 자각하고 스스로 폭력과 안녕(bye)하길 권하고 싶다.
이야길 나누다보니 촛불집회 이전 오만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평화롭고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그녀의 자유를 속박하려는 현실이 그녀를 집회꾼으로 만든 것처럼, 그녀를 평화롭게 내버려 둘 것 같지 않으니 말이다. “자기의 생활과 현실 속에서 자신과 주변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면, 집회와 시위에 대한 우리의 자유가 더 효과적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킬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유쾌한 모습이 스친다.
덧붙임
정인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