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숙 씨 댁을 찾아갔다. 곧 명동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갈 거라며 외출준비를 다 한 모습이셨다. 찾아간 우리에게 반갑다며, 그때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 많이 보고 싶다 하셨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와요
집에 하루 종일 있는 날은 별로 없어요. 왜 이렇게 바빴는지 나도 모르겠네.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거든요. 일이 손에 안 잡히니까 방에 앉아 있으면 우리 손자가 방에 가서 텔레비전 보라고 해도 눈에 안 들어와. 그래서 바깥에도 나가 봤다 다시 들어왔다가, 그러다보면 하루가 가더라고요. 어느 유가족도 똑같을 거예요. 마음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게 아니고 항상 마음이 불안해가지고. 작년엔 정신이 없어가지고 어디가 아팠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가만히 있으면 몸이 너무너무 아픈 거 있지. 잠을 못 자서 병원에서 수면제를 타다 먹거든요. 그걸 안 먹으면 잠이 안 와요. 그래야 한 시간이라도 자요. 다 그래. 다른 유가족 분도 몸이 뚱뚱 붓는다고 그래요. 붓기 빠진다고 약도 갖다 먹고. 이 마음은 언제 가라앉으려는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앉아있다가도 오래 못 앉아있어요. 삼십 분 앉아 있으면 오래 앉아 있는 것 같네. 그냥 또 들어가요. 방에 앉았다가 아이고 아니다 싶으면 또 나오고. 그런데 나뿐 아니고 우리 유가족들 다 그렇답니다. 우리 식구들 많이 있을 적엔 힘이 됐는데 이렇게 혼자 각자 와 있다 보니까 힘이 없어요. 마음 붙일 데가 없고. 투쟁하면서 같이 지내던 사람들 정말 보고 싶고요, 잘못 했다고 야단치던 사람도 너무 보고 싶고요.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니거든요. 어디다 화풀이를 할 수가 없고 성질만 나서 그렇지.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 사람들. 지금은 다 보고 싶어요.
아는 체 하는 게 부담스러워
신용산 교회에 한 십오 년 이상 다닌 것 같아요. 교회식구 얼굴은 다 알아요. 서로 얼굴을 다 아는 작은 교회거든요. 지금 내가 가본 교회는요, 어마어마하게 큰 교회예요. 그게 참 부담이 안 되고 나한테는 좋아요. 얼굴을 모르니까 말씀만 듣고 올 수 있잖아요. 얼굴 아는 교회는 서로가 인사도 하고 같이 앉아서 얘기도 하고 밥도 먹어야 해서 불편하거든요. 그런데 큰 교회를 가니까, 예배만 딱 보고 오니까 너무 편하고 좋아요.
누가 아는 체 하는 게 참 부담스러워요. 용산참사 유가족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참 불편하고요 굉장히 불편해요 그게. 그 분들은 우리를 위로해주려고 그러는 건데 우린 그게 참 불편하거든요. 어려워요. 그래서 큰 데 가게 돼요. 그냥 서로 얼굴 쳐다보고 고개 끄떡끄떡하면 오는 거니까, 누굴 내세우려 가는 게 아니고 말씀 들으러 가는 거니까 마음 편하고 좋더라고요.
그래서 밖에 나가면 사람을 절대 안 쳐다봅니다. 아는 체 할까봐 눈 마주칠까봐. 동네 마트 갔는데 누가 물어요, “같이 다니던 분 있죠? 왜 혼자 다녀요? 왜 같이 다니던 사람들 있잖아요.” 그러는 사람들 있어요. 우리 검은 옷 입고 다닐 적에 본 사람을 얘기하는 거였어요. 나를 그때의 모습으로 기억하니까. 하여튼 마트고 시장이고 가면 사람을 잘 안 쳐다봐요. 그게 참 힘들더라고요.
나도 많이 변했어요
요즘엔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도 가고, 거기는 우리 아들이 구속돼 있으니까 가게 됐고, 또 나 같은 경우는 남편이 죽었으니까 유가협(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에도 가요. 유가협에서는 우리 같은 사람을 받아들인 지 굉장히 오래됐다고 하더라고. 이런 일을 겪고 보니 그런 게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우리는 아직 그냥 열사분들만 모셨지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진상규명팀이 꾸려졌잖아요. 할 일이 깜깜한 것 같애. 또 우리보다 어려운 일을 닥친 데가 있으면 가야하고, 이걸 다 이겨야지 된다고요. 나 같은 경우는 아들이 구속돼 있으니까 해야죠. 월요일은 전철연 의장님 재판 아니면 철거민들 재판이라, 월요일은 법원 가는 날. 오로지 토요일은 가정의 날이라고 해서 우리 아들 보러 면회 가는 날. 아직은 집에 있어도 마음은 바깥에 가 있어서 무슨 일 있으면 바깥으로 먼저 나가야 돼.
난 처음에 유가협, 민가협이 무슨 말인가 했거든요. 그냥 아무것도 몰라요. 몰라도 열심히 가려고 노력은 하는데, 잘 못 따라가요. 유가협도 매일 가서 거기 식구들하고 얘기도 해야지 그분들이 어느 분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전혀 모르잖아요. 그전엔 들으면 머릿속에 입력됐는데 요즘은 하나 들으면 하나 잊어버리거든요. 앞으로 할 일이 깜깜한데 아무것도 몰라서 걱정이에요. 열심히 쫓아다니려고 노력은 하고 있죠.
이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우리한테 이런 일이 생길까 하면서 산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유가족들이 같이 뭉친다는 건 참 힘들어요. 장례 치르기 전에는 어쩔 수없이 같이 있었는데, 지금은 각자 집으로 가서 살다보니까. 서울 사람들은 전화를 하면 만나기가 쉬운데 수원사람들은 만나기가 좀 힘들어요. 어저께도 다 왔는데 한 분은 안 왔어요. 전화가 돼서 온다고 했는데 안 왔더라고요. 전화를 거니까 꺼놨어요. 그런데 그 사람도 오죽 힘들었으면 그러겠어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사람 심정은 모르는 게 아니지. 그 사람도 원래 잘 안 나다니던 사람이라. 누구하고 얘기도 잘 안 해보고 살던 사람이라서 그게 참 힘들더라고. 작년에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지금은 상대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같애.
이 일 겪고 나도 많이 변했어요. 우리는 삼남매를 키웠거든요. 정말 이놈의 새끼 한마디 않고, 때려보지 않고 키웠거든요. 그래서 우리 딸이 그랬잖아요. 엄마 입을 쳐다보면 어떻게 저렇게 욕을 하는지. 욕이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지 모른다잖아요. 근데 그건 어쩔 수가 없어요. 보기만 하면 다 욕이에요. 경찰관 보기만 해도, 지금도 지나가면, 저 사람 같지 않은 새끼들이라고 하죠. 그냥 안 지나가요. 뭐 지금은 그때보다야 욕을 많이 안 하죠.
함께 해준 많은 사람들
장례 전보다 사람들 관심이야 많이 줄었죠. 그래도 장례 전처럼 우리와 같이 하자고 하면 안 되죠. 사람 사람마다 다 생활이 있잖아요. 많은 분들이 정말, 정부는 인정을 안 했어도 정말 우리 곁에 많은 분들이 있었잖아요. 다 팽개치고 우리한테 와 있었는데 지금도 바란다면 그건 제 욕심이에요. 그건 절대 아니죠. 정말 어디서든 힘들지 않게 잘 했으면 좋겠고 일자리 찾아서 좋은 일 많이 했으면 좋겠고 만나봤으면 좋겠고. 그때 투쟁하면서 같이 있던 사람들 중엔 유가족들 안 만나려고 한 사람도 있다잖아요. 무섭다고, 하도 쪼아대니까(웃음) 근데 지금은 아니죠. 지금은 쪼아댈 일도 없고, 의지해서도 안 되고 지금은 의지할 수 있는 단계도 아니고 의지해서도 안 되고요 의지하려고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야지. 자기 삶이 있는데, 관심이 줄어든 건 사실이죠. 그럼 그 사람들 지금까지 같이 있으면 안 되는 거죠. 삶이 다 따로 있어요.
우리 아들이 나와야 생활을 할 수 있고. 우리 아들이 안 나오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게 걱정이지 다른 건 걱정 없어요. 죽지 않고 살지 뭐 사는 건 살아요. 사람들이 풀려야 유족이나 주민들이 모여도 마음이 편하지. 24일이던 선고 공판이 늦춰졌다고 문자가 왔어요. 이게 잘 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정말 밝혀져야 되는 거죠. 그 사람들 동지나 아버지들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거든요. 목소리를 내고 싶고 대화가 하고 싶었던 사람들이라서, 정말 이게 뒤집어져야지 되겠는데 하는 마음뿐이죠. 나는 기독교고 미사고 상관없어요. 미사를 가도 내가 기도하는 건 마찬가지고요. 믿는 건 딱 한분이거든요. 늘 기도해요. 없는 사람 편에 좀 서 달라고.
다들 고생 많이 했는데 정말 우리 식구들, 다. 편안한 마음으로 다들 좋은 일자리 좋은 생활 했으면 좋겠고. 우리나라 정부를 좀 바꾸어야 되는데 안 바꿔줘서 걱정이고요.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우리 앞에도 좋은 날 올 거라 생각해요. 고마워요.
덧붙임
윤미 님은 <인권오름> 자원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