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개를 많이 사랑해서 외출하거나 지하철을 탈 때도 품에 안고 다녔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개가 똥을 싸버렸다. 주인은 치우지 않았다. 그는 ‘개똥녀’라는 이름을 얻고 유명해졌다. 모두에게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지만 개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옷과 신발, 염색으로 예쁘게 치장하고 더 이상 짖지 못하는 개를 만나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아니다.
수십만 마리의 닭과 오리, 돼지들이 조류독감이다, 신종플루다, 구제역이다며 영문도 모른 채 생매장 당하는 일이 거의 매년 벌어져도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놀라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아니다.
점점 무뎌지는 생각의 끝에는 한없이 고립되고 파편화된, 그래서 더욱 쉽게 조종되는 무기력한 개인들이 살고 있다. ‘나’이외에는 관심이 있을 수 없는 그곳에서 타인을 돌아보고 자연과 공감한다는 건 가능한 일일까. 은비 못지않게 이웃집 여인이 슬프고 안타까운 이유이며 ‘인권’이라는 말이 왠지 고루하고 낡은 느낌을 주는 이유다.
사회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 자연이 처한 현실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자연을 돌아보면 그 사회를 읽을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자연인 몸. 오히려 건강에 그리 좋은 건 아니라는 식스팩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코를 세우고 턱을 깎고 눈에 칼을 대는 건 4대강에 포크레인의 삽날을 들이대고 강을 파헤쳐가며 세련된 자전거도로의 환상을 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은비를 통해서 그냥 무기력하기에 흉포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을 뿐. 그러니 자연과 세상과 ‘나’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울에 비친 자기모습에 침 뱉기와 다름없으니 필요한 것은 연민과 북돋움이다. 내편 네편 할 것 없이 만연해 있는 과도한 공격성은 우리를 점점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이것은 현재의 시스템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다. 흥분하기 쉬운 대중, 무기력한 개인, 손쉬운 통제와 조종.
10년에 걸친 새만금 갯벌 살리기 운동, 결과를 보는 이들에겐 좌절과 무기력함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정말 잃어버린 10년일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어린이들에게 갯벌과 바다의 소중함, 함께 살아가야할 자연, 우리는 자연과 하나라는 놀라운 자기인식을 심어주었다. 천성산의 도룡뇽을 살리기 위한 자발적 촛불은 전국에서 지펴졌다. 온 나라의 강과 산, 숲과 마을이 더 이상 ‘환경’이라는 자연을 대상화 하는 낡은 개념에서 해방되어 내 삶의 하나가 되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권’이라는 좁은 틀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인간선언’이 숨 가쁘게 전개된 것이다.
‘우리는 전체로서 조화로운 하나’라는 앎은 논리적, 과학적인 추론의 과정이 아닌 앎과 기억해냄의 과정이다. 뭇 생명의 고유한 존재가치를 존중하는 ‘생명권’은 상생의 의미를 지닌다. 조선일보도 인정해 주는 것이다. 내키지 않고 쉽지 않은 일이다. 히틀러에겐 유대인에게 그만 화내고 그들의 삶을 존중하라는 이야기다. 9.11테러의 유가족들이 이슬람을 포옹하는 이야기다. 월스트리트에겐 그런 식으로 수익률만 좆지 말라는 이야기다. 아무리 부족하고 분노해도 상대의 씨를 말리지는 않는 것, 그것은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벗어난 이야기다. 죽도록 미워하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나로부터 시도할 만한, 나로부터 변화한다는 이야기다. 오랜 시간 갇혀있던 차원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다. 시스템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야기다.
덧붙임
이재용 님은 풀꽃세상을 위한모임 사무국장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