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에 앞서]
“책 읽어주는 언니”는 여덟살 이상 아동과의 인문학 강좌가 가능한지를 모색하는 일종의 실험으로써 시작되었다. 작년에 첫 발을 뗀 이래로 ‘책언니’의 지향에 공감하는 지역 모임, 도서관, 지역아동센터 등에서 8세~10세 사이의 다양한 아이들을 꾸준히 만나고 있다. 20대 초반의 두 언니들이 선생보다는 친구 같은 관계로 아이들을 만나고, 그림책을 매개로 한 인문학 강좌를 통해 아이들이 원래부터 가진 질문과 상상의 가능성을 잃지 않도록 돕는다. 여기까지가 애초의 기획 취지였는데, 실상은 그냥 애들 만나서 지지고 볶고, 싸우고, 많이 놀고, 세상에 대한 얘기도 아주 조금 나누고,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다.
아수라장 책언니
만약 누군가 책언니의 수업을 옆에서 지켜본다면, 다음의 단어들로 우리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난장판, 난리법석, 아수라장, 개판5분 전. 또 뭐가 있더라. 이제 겨우 2학년 된 애들이 대체 학교에서 무슨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는 건지, 2시에 수업 공간(어린이, 어른 공용 도서관. 다행히 어른들은 거의 없다.) 도착하자마자 무시무시한 데시벨로 소리를 지르며 온 사방을 뛰어 다닌다. 가끔은 살짝 맛이 간 것 같아서 무서울 때도 있다. 이해는 간다. 학교가 파하고 이 공간에 도착한다는 것은 얘들한테는 나름 퇴근(?)의 의미 아닌가. 집에 가기 전에 양껏 놀아야지. 암, 그렇고말고. 이맘때쯤 애들은 정말로 몸에서 황소 기운이 솟아나는 것 같다. 에너지를 주체 하지 못한다. 30분 동안 밖에서 실컷 뛰어놀았건만, 놀이 하나가 끝나면 이젠 또 뭐 하고 놀 거냐고 물어본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말 할 기운도 없는데!) 뛰는 건 괜찮다.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상관없다. 이 도서관에서는 다행히 이해해주시니까. 진짜 난감할 할 때는 망아지처럼 자유분방하게 날뛰던 아이들이 앞발질, 뒷발질을 난사하여 기물을 파손할 때다! 한 번은 자기들끼리 놀다가 도서관 입구에 세워둔 커다란 화분을 깬 적도 있다. 도서관 운영 하시는 관계자 분들이 하해처럼 마음이 넓은 분들이시라 천만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진즉에 쫓겨났을 지도 모른다.
요즘 2학년들 사이에서는 도서관 한 귀퉁이 방에 들어가 문 잠그고 ‘작전회의’라는 걸 하는 것이 유행이다. 2시에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그 방으로 들어가 책언니들을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 전략을 짠다. (남자애들이 ‘수호지’를 한참 하더라니, 전쟁놀이에 심취하셨다.) 무거운 방문이 천천히 열리고 방석을 든 아홉 살 군단이 ‘우아아’ 하는 함성소리와 함께 달려 나오면 ‘방석 지옥’이 시작된다. 사방에서 온갖 방석이 쇄도하면서 우리를 공격해대는데, 힘이 좀 되는 쩡열이야 남자애들 서너 명이 달라붙어도 지지 않고 오히려 애들을 날려버리지만, 비실비실한 나는 얼마 못 버티고 바닥에 덜렁 나가떨어지고 만다. 그 위로 쏟아지는 방석 어택. 한 살 더 먹더니 어찌나 힘들이 세졌는지. 의기양양한 얼굴로 형형 색깔 방석을 내려치는 우리 아홉 살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얘들아. 니들은 재밌니. 나는 아프다.
그런 식으로 수업해도 되는 거야?
간혹 어른들은 이렇게 당하고 사는(?) 책언니들을 지켜보면서 ‘이건 아니지 않나, 애들 너무 풀어주는 거 아닌가?’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시기도 한다. 음. 애들이 간혹 ‘이건 좀 아닌데’ 싶을 정도로 우리를 막 대할 때가 있다. 한번은 치마를 입고 갔더니, 몇 명이 동시에 달라붙어서 그 치마를 머리끝까지 들춰 대는 통에 농담이 아니고 진심으로 울 뻔한 적도 있었다. 만만한 언니들인 것도 좋지만, 애들이 쏟아내는 공격성을 그냥 몸으로 때우는 거(?) 말고 좀 더 잘 풀어줄 방법은 뭘까 요즘 좀 고민이 되긴 하는데, 어른들의 걱정은 이것과는 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 같다. 보통 이런 말씀 하시는 분들은 애들 버릇 나빠지는 걸 걱정하는 분들인데,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 사회의 어른들이 애들을 어떤 식으로 취급하고 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서 속으로 짜게 식고는 한다. 애들을 너무 풀어주는 게 문제라니, 그렇담 애들을 적당히 묶어놓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진짜 무슨 동물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묶긴 왜 묶나. 애들이 왜 도서관만 오면 미친 듯이 날뛰는지 알만 하다. 하루종일 저런 생각이나 어른들이 만든 정신적・신체적 울타리에 갇혀 있다가 왔으니, 쌓인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겠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수업해도 되는 거야?” 은근슬쩍 따지고 드는 어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그렇게 애들 괴롭혀도 되는 거야? 여덟살, 아홉 살 사람들은 항상 자신들을 ‘적당히 묶어두려는’ 어른들에게 눌려서 산다. 어리다고, 아는 게 없다고, 자기를 눌러두는 힘에 대한 분노가 없을 리가 없다. 하루는 애들이 평소보다 더 심하게 때리길래(?) 너네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봤더니 시험공부를 학교 끝날 때까지 하고 왔다고 했다. 성질이 난다고 공부 시키는 어른들을 때릴 순 없으니, 대신 만만한 우리한테 시비 걸고, 막말하고, 방석어택하고, 억눌린 공격성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일종의 대리복수인 거겠지.
여덟 살 구역으로 한 걸음 더
두 달쯤 전이었나. 한 번은 ‘우리에게 금지된 17가지’라는 발칙한 그림책을 가지고 가서 금지에 대한 수업을 했다. 이 책에는 동생 머리카락에 스템플러를 찍는 등 온갖 금기에 도전하는 짓궂은 여자애가 등장하는데, 책의 마지막 장면이 꽤 의미심장하다.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요.” 사과를 하며 엄마와 포옹한 상태로 독자들을 향해 ‘메롱’을 하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 다신 안 그런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따라 어쩐지 쩡열이 유림이와 도서관 밖으로 나가서 한참을 들어오질 않았다. 유리창 바깥을 보니 두 사람은 도서관 옆 나무 탁자 앉아서 한참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얘길 했느냐고 물어보니, 쩡열이 이 얘길 들려줬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쩡열: 너희들한테도 금지된 게 있어?
유림: (잠시 고민하다가) 없어.
쩡열: 에이, 그럼 교실에서 막 욕 할 수 있어?
유림: (엄청 당당한 표정으로) 응. 다 할 수 있어.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욕도 하고, 하고 싶은대로 다 할 수 있어! (2초쯤 뜸 들이다가 씩 웃으면서) 단, 선생님만 없으면.“
감탄한 쩡열은 내친김에 다음 질문까지 나아갔다. 저 책에 나오는 애는 금지된 걸 안 하는 애가 아니라 안 하는 척 하는 거잖아. 어른들을 안 믿게 됐어. 너희는 어른들을 믿어? 유림이는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씩 웃으며 말 했다. 안 믿지!
쩡열: 그럼 언제부터 안 솔직했어?
유림: 네 살부터 안 솔직했어.
아마 실제로 네 살 때부터 솔직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만큼 자신의 불신이 오래되었다는 의미로 해준 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일화는 나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책언니의 레전드 일화로 통한다. 유림이는 작년까지만 해도 다른 애들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라도 말해줄라치면 ‘그 얘기 하지말라’고 입단속을 했던 친구였다. 그랬던 유림이가 이런 얘기를 쩡열에게 해줬다는 건 우리를 어느 정도 믿어주고 있다는 뜻 아닐까 싶어서 이렇게 멋진 얘길 들려준 유림이한테 무지 고마웠다.
‘우리에게 금지된 17가지’ 같은 그림책은 작년에도 많이 들고 갔었다. 하지만 그 때는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우리가 뭘 가지고 가든 귓등으로도 안 듣고 귀찮아하는(;) 느낌이 있었다. 지금은 그 때와 뭐가 다르기에 유림이의 반응이 달라진 걸까? 수업 내용은 작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 없다. 달라진 건 우리의 관계다. 우리가 만난 시간 동안 쌓인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애들로 하여금 자신이 이 세계에 가진 불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어린 사람들이 어른들에게 가진 불신과 공격성은 생각보다 깊다. 이 정도 친해지는 데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오래 만나야 한다. 우리는 너희들 편이라고, 아니, 너희들 편이 되고 싶다고, 여덟 살 구역의 입구 앞에서 문을 두드리는 충분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들은 그 문이 열린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그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를 믿어 달라’ 는 안타까운 부탁 밖에는 없다. 그래야만 할 정도로 애초에 이 사회에서 맺는 관계라는 게 아이와 아이가 아닌 사람들의 사이를 벌려 놓았다. 책언니들이 여덟 살 구역으로 정말로 일보전진 했는지, 아닌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느 날은 열 걸음쯤 깊숙이 들어간 것 같다가도 어느 날은 순식간에 문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 같을 때도 있다. 끈질긴 좌충우돌을 겪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여덟 살 구역의 문을 줄기차게 두드리고 있다.
덧붙임
엠건 님은 '교육공동체 나다' 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