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말 광주광역시의 한 중학교 도덕교사가 직위해제 되었다.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 역전된 사회를 담은 <억압당하는 다수>라는 영상을 성평등 교육에 활용했으나, 학생들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었다는 이유다. 해당 교사와 교사·지역단체들은 '성평등 교육’이라는 취지와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성비위 근절 의지만을 과시하려는 관료행정이라며 즉각 비판하고 나섰다. 반면 교육청은 최초 민원 이후 학생 전수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비위로 규정할 수 있다고 보고 '피해자 우선’ 원칙에 따라 교사 수업배제 조치를 내렸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교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직위해제를 결정, 경찰에 수사를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성평등 교육과 온전한 스쿨미투를 지키는 사람들’(가칭)이 준비되고 있다고 한다. '온전한’ 스쿨미투는 누가 판단하는 것일까. 스쿨미투를 '지키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 논의에 학교 여성 청소년의 자리는 있을까? 이 사건은 스쿨미투와는 상관없는 성평등 교육내용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스쿨미투의 흐름과 문제의식 속에서 더욱 이 사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드러나지 않는 것
문제가 된 <억업당하는 다수> 영상이 중학교 성평등 교육에 절절한 자료였는지 혹은 교육청의 성비위 판단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분명 필요한 과정이다. 하지만 이 사안이 해당 교사 및 교사집단과 교육청의 책임 소재 공방이 되고 있는 현실은 이 논쟁에서 무엇이 비가시화되어 있는지에 대해 우리의 성찰을 요구한다.
문제를 제기했던 학생들 외 다수 학생의 기억, 도덕수업 전문가, 교육청은 이 사안을 해석할 수 있는 주체로 등장하지만, 정작 피해를 말했던 학생들의 목소리는 성적 수치심과 불쾌함이라는 단어 이외에는 잘 들리지 않는다. <억압당하는 다수>와 이에 대한 교사의 발언이 학생들에게는 어떤 의미였는지, 어떤 맥락에서 수치심이나 불쾌감을 느꼈는지, 그렇게 느낀 이유를 무엇인지, 성평등 수업의 일환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던 부분은 무엇인지 등. 피해 학생들이 논쟁의 전면에 등장해 증언을 해야 한다거나 학생들의 문제제기가 일말의 검토 없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교사와 교육청이 피해 학생들의 이야기에 각자 어떤 성찰과 대답을 가지고 있는지가 '해결’의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피해 이후 학생들은 교사에게는 '오해’와 '불만’의 대상으로, 교육청에게는 '보호’의 대상으로 남을 뿐이다.
'성평등 교육’의 동등한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성평등 교육은 명문화된 교육과정이나 내용에 기반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현실과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그 의미가 획득될 수 있다. 우리의 사회현실과 구성원들 간의 권력관계 속에서 다양한 주체들이 제시하는 지식과 해석이 경합하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수정되고 재구성되는 구성물인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성평등 교육은 교육내용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습자 간의 권위와 권력의 문제를 쟁점화하고, 교육 내용의 선택과 해석, 평가 전 과정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의 협력적이고 민주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억압당하는 다수>가 어떤 내용인지가 성평등 교육의 전부일 수는 없다. 성평등 교육은 교사와 학생 사이의 민주적인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권력관계와 위계적인 교육문화를 변화시키고자 할 때 가능해진다.
그런 점에서 이 사안을 교육청에 의해 교사의 전문성과 교육활동의 권한이 침해된 것으로 규정하고 문제제기하는 것은 우려스럽기도 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교육 내용의 적절함 이전에 학생이라는 존재가 그 교육 내용을 놓고 교사와 함께 공동의 해석을 만들어갈 수 있는 동등한 주체, 서로 다른 위치에 놓인 '동료’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해당 사건의 교사가 수업의 의도를 강조하면서 내용과 발언의 '맥락’이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만큼, 왜 그러한 맥락에 대한 질문과 토론이 실제 수업 현장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지에 대해서도 성찰이 필요하다.
작년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가 '구지가’(龜旨歌)를 가르치면서 거북이 머리를 남성의 성기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 사례가 스쿨미투로 알려지자 '황당 미투’, '억지 미투’, '여론몰이’ 등 많은 비난을 받았다. 광주시 교사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성희롱으로 '심판’받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거북이 머리가 남근으로 해석된다는 사실 자체에 문제제기 한 것이 아니다. 교사가 수업 내용을 빌미삼아 성적인 뉘앙스를 담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수업시간에 문제제기도 여러 번 이루어졌지만, 그때마다 무시를 당하거나 욕설을 들어야 했다. 이는 수업 맥락에 대한 견해차이가 아니라, '누가’ 맥락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규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는가의 문제다. 학생들에게는 바로 그 권력이 없을 뿐이다.
<억압당하는 다수> 수업의 상황이 이와 유사하다고 확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스쿨미투에 대한 학교 내외부의 진실공방이 적지 않은 현실, 학생들이 예민하다거나 '오해’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현실, 용기를 내서 불만을 표시해도 교사로부터 무시나 괴롭힘을 당하는 현실에서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는 소통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이다. 이는 학교 내 교사-학생의 권력관계를 성찰하지 않고서는 변화시킬 수 없는 현실이다. 이 변화가 페미니스트이든 아니든 개인 교사들의 역량이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고, 학교 내 권력구조와 학교문화에 대한 고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스쿨미투의 외침대로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법절차에 목매는 교육청, 교사에게 떠넘기는 학교
광주광역시교육청은 이번 사안에 대해 "가장 안타까운 것은 피해 학생의 목소리, 피해 정도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는 전혀 나오고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피해 학생들의 상황에 어떤 공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여름 광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전체 교사의 20%가 성희롱・성추행을 했다고 고발되었고, 피해 학생은 180여명에 달했다. 교육청은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도 시의회가 요구한 전체 학교를 대상으로 한 전수조사 요구에 대해서 불가 입장을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 학생들의 목소리가 공론화되지 않는다는 우려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스쿨미투 학생들의 비판은 바로 눈앞에 닥친 문제만을 '땜빵’ 대처로 일관된 교육당국과 제도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스쿨미투 1년 이후 학교는 학생들에게 얼마나 평등한 공간이 되었나? 이번 사안처럼 스쿨미투의 신호탄이 되었던 용화여고 신고도 모두 '국민신문고’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학교는 이미 학생들에게 불신의 공간이다. 학생들은 학교 내 기관이나 절차를 통해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정당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자체가 없다. 성차별과 성희롱・성추행을 사소하고 개별적인 문제로 바라보는 관행, 교사를 비호하고 학생에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을 강요하는 교사-학생의 권력관계, 조용히 넘어가지 않고 '문제를 일으킨’ 사람에 대한 회유, 협박, 괴롭힘, 불합리한 대우 등은 이미 '학교문제’였다.
스쿨미투 이후 더 심각해진 문제는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발 빠른’, '엄격한’ 대처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학교 내 구성원들 간에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평등과 민주주의가 들어설 기회 자체가 사라진지 오래다. 교육당국의 '강력한 의지’는 문제의 원인 파악과 함께 학교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대책마련보다, 최대한 말이 나오지 않는 방향으로 절차를 밟을 때 더 쉽게 발휘된다. 하지만 수사 결과 전까지 교사에 대한 징계를 미루다가 논란이 되면 후다닥 징계를 내리기도 하고, 가해 교사가 학교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다시 논란이 되면 무혐의를 받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일선 학교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학교 내에서 이미 스쿨미투는 아무도 맡고 싶지 않은 골치 아픈 사안이다. 학교장은 최종 책임자지만 결정과 해결을 교육청에 떠넘기고, 책임은 개별 교사에게만 부과한다. 학교와 교육청은 엄격하고 신속하게 사법절차를 밟는 게 성희롱·성폭력 대응 역량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성별 권력관계 약자들의 대응역량을 높이는 게 아니라, 교육당국과 사법당국의 권한만 키우는 것이다.
학생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는 것부터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결심한 학생들이 국민신문고라는 외부 민원 절차, 학교보다 더 권위 있는 교육기관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학교 외부의 절차가 있었기 때문에 여성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스쿨미투로 터져 나오는 것이 가능하기도 했다. 교사 개인의 품행이나 태도 문제로 축소시켜왔던 학교 내 성차별과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사실은 구조적인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가감 없이 폭로했다. 하지만 학내와 제도 내에서 교육 주체들 간의 권력관계를 평등하게 만들고 학교를 민주적으로 만드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학생인권과 학교 내 민주주의는 마치 스쿨미투와는 관련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것은 스쿨미투 운동의 한계가 아니라, 스쿨미투가 학교에서 재생산되는 성차별적 구조와 성별 권력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운동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기존 교육제도의 한계이다.
스쿨미투는 학교에 변화를 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변화를 학교와 사회에 알리는 여성 청소년들의 폭발적인 외침이었다. 성평등 교육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변화시켜나가고자 하는, '온전한’ 스쿨미투에 머물지 않고 확장시키려는 외침은 더 커질 것이다.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성차별인지, 페미니즘 교육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으며 성평등한 학교의 비전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까지, 이제 그 외침 앞에 놓인 과제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그것을 해결해가는 과정은 학생을 동등한 교육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 위에서 구성원들이 함께 개입하고 논의하고 때로 비판하면서 소통할 때, 우리는 성평등한 학교, 성평등한 사회에 한발이라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