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일본 나고야에 다녀왔다. 사랑방 상임활동을 하면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도 활동하고 있는데, 살림 임직원들과 함께 60여 년 역사를 가진 ‘미나미의료생협’으로 연수를 다녀온 것. 아침 9시부터 밤 10~11시까지 이어지는 2박 3일의 일정을 마치고, 드디어 마지막 날. 태풍 하기비스가 나고야를 통과할 것이라는 경보가 확실해졌고, 비행기가 결항되었다. 연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다들 하루 이틀의 휴가를 나고야에서 보낼 예정이었는데….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서울로 돌아가면 줄줄이 사탕 같은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 기뻐했다. ‘태풍인데 어쩌겠어.’ 지금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일시정지 된 나고야의 풍경
태풍의 통과 시각은 늦은 밤으로 예상되었지만, 오전부터 편의점과 호텔을 제외한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았다. 아침 일찍 식사를 하러 나섰다가 허탕을 친 다른 일행들은 대형 건물들이 모여 있는 번화가의 1층이 모두 모래주머니로 채워진 모습을 봤다고 했다. 내가 묵던 숙소 바로 옆에 있던 편의점에도 신선식품이나 큰 생수는 다 떨어져 인스턴트 음식으로 하루의 끼니를 해결했다. 일본 편의점 음식이 맛있다고들 하지만, 하루 동안 숙소에 갇혀 먹고 있으니 ‘음식다운 음식’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가져간 노트북으로 일을 하다가, 잠들었다가, 잠깐 깨서 다시 일을 하다가. 태풍이 가까워지는 저녁이 되자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조차 조용해졌다. 길가에 사람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려 내려다보면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밤이 되자 태풍이 완전히 지나갔다. 도쿄 인근을 중심으로 큰 피해를 남겼고, 태풍의 중심이 통과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나고야는 스쳐 지나가는 정도에 그쳤다.
한국이었다면 어땠을까. 일행들과 가장 많이 나눈 질문이었다. ‘이 정도’ 태풍이었다면 한국은 계획되었던 외부 행사도 모두 그대로 진행되지 않았을까? 누군가 말했다.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떠올리면 일본 정부의 재난 대응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괴롭지만… 그럼에도 최소한 재난이 예상되었을 때 사람들을 움직이는 시스템이 다르다는 인상은 남아 있다. ‘진짜로’ 문을 다 닫을 줄 몰라서 당황했고, 일시에 정지된 대도시의 풍경은 낯설었다. ‘이 정도’ 태풍으로 모든 가게의 문을 다 닫게 했을 때 경제적 손실과 사람들의 비난을 어떻게 감당하는지를 무심코 떠올리다가, ‘그래도 이렇게 하는 게 맞지’ 하는 생각을 오갔다. 그 생각들 속에서 내가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
태풍이 지나간 늦은 밤, 말 그대로 숙소를 뛰쳐나와서 맞았던 바람은 너무 시원했다. 다른 숙소에 머무르는 일행들과 만나 우연히 발견한 한식당에 들러 먹었던 감자탕과 김치가 너무 맛있었다. 마음 편한 사람들과 지난 며칠간의 경험, 현재의 고민, 쓸데없는 농담들을 주고받는 시간이 즐거웠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느낌. 내가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왔던 방식대로 움직이고, 말하고, 느낄 수 있다는 안도감. 태풍으로 인한 반나절 동안의 걱정과 우려, 답답함은 이 잠깐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소멸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사랑방의 자원활동가모임인 ‘노란리본인권모임’에 올라온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올해 10월이 참사 20주기가 되는 달이라, 희생자 유가족의 인터뷰가 담겨 있었다. “꼭 20년이 지났지만 그날은 생생해.” 아직도 너무 생생해, 마치 어제 일 같아, 재난 피해자들의 이야기 속에서 가장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었던 말이 다시 눈에 밟혔다.
기사를 읽으면서 노란리본인권모임에서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자료집을 발간할 때 사람들과 함께 재난 이후 피해자들이 경험하는 ‘시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피해자들이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마주하면서도 삶을 다시 살아나가기 위한 일상의 시간을 보낼 때, 사람들의 ‘피해자 맞아…?’하는 의구심과 비난 섞인 시선이 왜 피해자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지.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왜 재난 피해자의 경험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지, 피해자가 재난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왜 우리에게도 중요한지. ‘원래대로’, 재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 있을 때 재난의 시간에서 비켜 서 있는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지. 피해자의 권리 핸드북을 준비하면서 그때의 고민들을 끄집어내어 다시 돌아보고 새롭게 쓰고 있는 요즘, 다른 사람이 보내고 있는 시간을 상상해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어떤 위험에서 얼마나 쉽게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는지를 떠올리며 그저 가늠해볼 뿐이다.
‘세월호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게 나한테는 어렵게 느껴져.’ 동료 활동가의 말 속에서 나도 비슷한 마음을 느낀다. 슬픔을 표현하는 것도, 함께 분노하는 것도, 언제나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모든 것이 과한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요즘도 그렇다. 그럴 때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에서 다시 보게 된 문구가 나에게 어떤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피해자들이 조금 더 나은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서로 다른 삶의 조건에 놓여 있더라도, 나뿐만 아니라 누구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을 시작점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거라는 믿음. 인현동 화재 인터뷰는 내가 가진 그 마음을 새삼스럽게 다시 되돌아보게 해주었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의 시작
“우리 사고는 '인현동 호프집 화재'라고 많이 불렸다. '호프집'이란 단어 때문에 아이들이 왜 거기 있었냐는 부분에만 초점이 맞춰졌고, 사고의 책임이 있는 어른들 잘못은 가려졌다. 먼저 명칭부터 '인현동 화재 참사'라고 바꿔야 한다고 본다.” (오마이뉴스, “질식사한 내 아들… 국가는 20년을 침묵했다”)
인터뷰의 한 대목을 읽고, 몇 달 전 읽었던 레베카 솔닛의 책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Call Them by Their True Names)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일단 우리가 이것을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면, 그때부터 우리는 비로소 우선순위와 가치에 대해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잔학함에 대한 저항은 그 잔학함을 숨기려는 언어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세월호를 ‘사고’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분노했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던 ‘호프집 화재 사건’이 피해자들을 다른 시간 속에 살게 했던 이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그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려고 노력하는 일, 그것이 우리에게 전망을 불어넣는 대화를 독려하는 방법이라는 저자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것은 피해자의 목소리가 있기 때문에 기댈 수 있는 전망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삶의 풍경을 어떻게 묘사하는지에 따라 다른 의미가 담긴 삶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을 때, 다른 사람들이 펼쳐주는 풍경을 들여다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는 다짐. 피해자와 다른 시간을 살지만, 피해자의 ‘곁에’ 서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격려하고 싶은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