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5월 광장 어머니회’, 스페인 여성의 날 시위, 볼리비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멕시코 망명까지…. 이번 후원인 인터뷰는 언제나 저에게 중남미를 비롯해 스페인어권 국가의 역사와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는 니나님을 만났습니다. 인터뷰 마감을 잊고 있던 와중에 여성운동을 함께 했던 동료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도 한 니나님에게 급하게 연락해 늦은 밤 사랑방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는 후문을 전하며…
◇ 오밤중에 감사합니다. 우선 자기소개를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니나입니다. 학생 때는 여성주의 교지를 만들면서 학내외 여성주의 활동을 했고, 주로 여성주의 글쓰기와 문화운동을 했어요. 지금은 대학원에서 중남미 문학을 공부하고 있고, 스페인어 번역이나 강의, 통역 등을 하고 있습니다.
◇ 사랑방은 언제 처음 알게 되었나요?
제가 몇 년 전에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페미니즘 학교에서 스페인어 강의를 했는데, 사랑방에서 활동하는 민선님이 제 수업을 들었어요. 그 때 기억엔 민선님이 항상 바빴다는…. 민선님이 안식년에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남미에 갈 계획이었는데, 활동가들끼리 함께 장기 여행도 갈 정도로 가깝구나 생각했어요.
내가 사랑방을 어떻게 알게 되었지? 떠올려보면 그냥 오래 거기에, 어디에나 있었던 것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어요.
◇ 사랑방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글을 다 읽는다고 말씀하셔서 저를 깜짝 놀라게 했는데, 어떤 느낌인가요?
사랑방 활동가 자신들이 어떻게 조직되어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성실하게 기록한다는 느낌이었어요. 굉장히 신문 같은 느낌이 있기도 해요. 그럴 것이라 예상했고, 홈페이지가 생긴 것도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개개인 활동가들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고 그걸 공유하려고 한다는 느낌이 강해서 놀랍고 재미있었어요.
◇ 스페인어 번역을 많이 하는데, 요즘 번역하고 있는 책은 어떤 건가요?
최근에 번역을 끝낸 건 <엄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라는 스페인 여성작가가 쓴 에세이예요. 롤모델이 없었던 고립 속에서 어떻게 책 속의 여자들을 만나고 함께 페미니스트로 성장했는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요. 요즘은 <고어 캐피탈리즘>(Gore Capitalism)이라는 책을 번역하고 있고요.
◇ ‘고어 캐피탈리즘’은 처음 들어보는 개념인 것 같아요.
멕시코 국경지대인 티후아나는 마약 시장과 카르텔로 알려져 있고, 여성이 빈번하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살해되는 곳이기도 한데요. 멕시코 주변부 남성이 폭력적 마약산업이나 조직범죄에 연루되는 과정 자체가 1세계 자본주의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이 유지되는 구조는 멕시코의 자본주의와 함께 여성혐오, 젠더 문제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거예요. 단순히 마약 산업의 부수적인 피해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과 신체의 거래가 새로운 상품이 되는 과정, 이것이 가장 수익성 높은 자본주의 형태가 되었다는 점을 짚고 있는데… 멕시코를 비롯한 저3세계 폭력과 자본주의를 ‘고어’라는 장르 용어와 결합해서 페미니즘 관점에서 보려한 시도라고 볼 수 있어요.
◇ 출간되면 저도 너무 읽어보고 싶네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의 책을 번역할 때 힘든 점이 너무 많을 것 같아요.
항상 어떤 긴장과 타협 속에서 번역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힘들죠. 그런데 그게 꼭 언어의 문제는 아니기도 해요. 한국 사람이 한국어로 쓰인 책을 읽어도 어느 정도까지 이해하는지는 찬차만별이니까요. 해독 안 되는 것이 언어만은 아니잖아요. 그 간극을 모두 번역자가 채워주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한데, ‘어디까지’ 할 것인지는 기본적으로 번역가의 선택이자 역량이니까요. 그렇게 하는 와중에 잃는 게 있고 얻는 게 있죠.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새롭게 생겨난 텍스트가 좋은 부분이 있기도 하고요.
◇ 지금까지 번역한 책 중에서 제일 힘들었던 책은?
작년에 출간된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일부에 참여했는데, 너무 힘들었지만 너무 폐를 많이 끼쳐서 언급하기도 부끄럽네요. 삽질을 해서 제 위로 모래를 부어야 할 것 같아요. (웃음) 보르헤스가 33세에 쓴 에세이를 번역하는데, 엄청 큰 위화감을 느껴요. ‘인터넷, 구글북스도 없던 시대에 이런 글을 썼다고?’ 글 자체도 너무 어려우니까 괴로워서 이런 망상도 들었어요. ‘내가 소화를 못 했어도 정성껏 원문 그대로 옮기면 똑똑한 누군가는 이해하지 않을까?’ 그런데 신기하게 그런 문장은 티가 나요.
◇ 제가 노지양 번역가 글에서 ‘톤 폴리싱’(tone policing, 차별당하는 사람이 부당함을 주장할 때 메시지보다는 ‘톤’을 걸고넘어지는 행동)이라는 단어를 보고 이마를 탁! 쳤는데, 혹시 스페인어 중에도 그런 새로운 단어가 있을까요?
비슷한 예는 아니지만, ‘chic@s’라는 단어가 있어요. 스페인어도 남성중심적인 언어라서 만약 어떤 집단에 여성이 99명이어도 남성이 1명이라도 있으면 남성형으로 바뀌거든요. 스페인에서도 페미니즘 투쟁과 시위가 활발하니까 ‘여러분들을 환영한다’는 인사를 할 때, 문법적으로는 남성형인 치꼬스(chicos)라고 하는 게 맞지만 일부러 여성형 치까스(chias)와 남성형 치꼬스(chicos)를 모두 따로 언급해요. 일상적으로는 o안에 a가 들어가 있는 형태로 ‘chic@s’라는 단어를 써요. x를 쓰거나. 이런 방식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거죠.
로망스어 계통의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느끼는 어려움일 텐데, 형용사가 다 여성형과 남성형이 나뉘어져 있거든요. 그렇다면 그 언어를 쓰는 국가의 성소수자들, 트랜스젠더나 젠더퀴어는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겠어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형용사를 안 쓰고 글을 쓴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러한 언어적 조건이 주는 엄청난 어려움이 있어요.
◇ 홍콩에서도 시위가 계속되고 있고 칠레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니나님 생각이 났어요.
저는 광주가 홍콩의 영감이 되고 있다는 식의 글을 많이 봤는데, 미류님의 글을 보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어요. 내가 세상의 이 많은 이슈를 다 따라갈 수 없는데, 이렇게 사랑방의 <인권으로 읽는 세상>을 통해서 다이제스트 과외를 받고 있구나…. (웃음) 칠레가 독재정권의 경험이나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데, 실제로 산티아고에 가 보면 서울과 너무 비슷해서 놀라거든요. 남미에 좌파정권이 강할 때에도 칠레는 우파정권이었고, 친미 관계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계속 펴 왔어요. 그래도 남미에서 제일 잘 산다는 인식이 스스로도 강했던 건데, 사실은 그게 다 허상이었다는 게 드러나는 것 같아요.
◇ 칠레 시위대가 광장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가 너무 좋아서 찾아보니,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라는 곡이었어요.
칠레가 민중운동가요의 전통이 깊어요. 남미에는 아예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ón)으로 분류되는 장르와 운동이 있어요. 정말 많은 훌륭한 시인들과 가수들이 참여했고요. 이 곡의 제목은 ‘단결한 민중은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콜롬비아 정치인이 했던 유명한 말을 가져다 만든 곡이예요. 남미 국가의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는 곡이라고 보면 돼요. 빅토르 하라, 비올레타 하라도 굉장히 유명한데 가사와 선율이 정말 아름다워요.
◇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인권이슈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페미니즘은 더 많이 대중화되었고 사람들에게 더 많은 힘을 주어서 다행이지만, 계속되는 성폭력 이슈들을 보면 심란해요.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청원하는 대상, 법원과 국가가 다 ‘노답’인데, ‘이게 다 무슨 짓이지?’ 싶고요. 제 삶에서 지나간 이슈라고 생각했던 게 ‘슬럿 셰이밍’(Slut shaming)이었는데요. 사람들이 나의 섹스와 몸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런데 모르는 사람부터 아는 사람까지 굉장히 광범위한 상황이 주는 모욕감과 수치심, 이게 어떻게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는지도 다시 떠오르더라고요. 최근에 멕시코에서 ‘리벤지 포르노’(불법촬영물)로 최대 징역 9년형을 받을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됐거든요. 이게 어떻게 가능했냐고 인터뷰하니까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우리가 계속 미친 듯이 물고 늘어지면서 싸워왔으니까’ 라고 이야기해요.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이런 좌절감과 울분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하게 되네요.
◇ 마지막으로 사랑방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랑방 활동가들이 건강하게 활동했으면 좋겠어요. 서로 힘 빠지지 않게, 행복하게. 밥도 잘 먹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