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
상담 20회차에 이르러서야, 거부하지 못하고 그저 내 몫으로 감내해야 한다고 여겼던 어떤 한마디가 10년 넘게 마음 깊숙한 곳에 박혀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보내온 10년이 지금의 나를 만들기도 했는데… 물리쳐야 할 것과 받아들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경계는 종종 헷갈리지만, 또 그렇게 불분명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에게 솔직하기가 이렇게 어렵다.
정록
사실, ‘거부’는 나에게 익숙지 않은 ‘행위’다. 20대에 요란뻑적지근하게 했던 ‘거부’를 생각해보면, 그게 거부이든 참여이든 뭔가 열렬한 ‘감정’과도 연결되는 행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류
거부와 거절, 비슷하면서도 다른 말. 많은 활동가들이 ‘거절을 잘 못하는’ 문제로 고민한다. 급박한 요청이나 간곡한 제안에 응답하다 보면 자신을 돌볼 틈이 없어지는 곤경에 빠지기 때문. 하지만 서로 응답하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돌봄의 실체이기도 하므로 거절은 잘 ‘안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미
거부‘감’. 뭔가 복합적이거나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이유로 마음이 동하지 않는 느낌. 문제는 이유를 설명하긴 힘든데, 그렇다고 “그냥”이라는 말은 하기 싫어 이런저런 이유를 덕지덕지 갖다붙이게 될 때. 그럴수록 나도 상대방도 길을 잃게 됐던 기억이 난다. 스스로 거절을 곧잘 하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그 거절의 근본적인 이유가 거부‘감’일 때에는 상황이나 여건 핑계를 댄다는 점에서 어딘가 애매하고 찝찝한 거절만 반복해왔나 싶기도 하고. 쩝.
가원
내게 거부는 지배적인 질서나 권력에 저항하는 상당히 정치적이고 적극적이며 변혁적인 행위인 거 같은데, 권력의 정점에서 그런 행위를 막는 행위에 ‘거부권 행사’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어딘가 대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민선
20년 만에 국회 통과한 개정 노조법을 무력화하는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함께 내고자 SNS 프로필 사진을 처음으로 바꿔봤다. 노조법 개정 활동을 함께하며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선전물을 전하며 노조법이 무엇인지 왜 개정되어야 하는지 설명하는 게 무척이나 어려웠던 기억, 많이 알려졌다고 생각한 거부권(재의요구권)이 무엇이고 왜 반대하는지를 물어본 분을 만났던 기억 때문이다. “거부권을 거부한다” “지키자 노조법” 적힌 프로필 사진을 누군가 보고 우리의 삶과 권리와 닿아있는 문제라는 게 전해지길 바랐다. 개정 노조법은 폐기되었지만, 노동자의 존엄과 노조할 권리를 위한 싸움은 언제나 계속되었고 계속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