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주] 모든 죽음은 산 자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기지만 어떤 죽음은 산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 이런 죽음은 죽은 자가 의도했든 아니든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남긴다. 생물학적 죽음을 수반하지는 않더라도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사실상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사회적 죽음도 있다. 죽음마다 다양한 사연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죽음을 부르는 한국사회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런 죽음이 계속되리라는 점이다. <인권오름>은 노무현 정권 시기인 2003년부터 최근까지의 죽음 가운데 점점 잊히고 있지만 산 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죽음을 기록함으로써 한국사회 인권의 현실을 점검한다.
윤장호와 김선일을 기억하는가?
지난 2월 아프가니스탄에서 폭탄 공격으로 사망한 한국군 병사 윤장호. 그리고 2004년 이라크에서 한국군 파병을 이유로 살해된 미국 기업의 하청 업체 직원 김선일. 이들의 죽음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넘쳐나는 뉴스와 글, 이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촛불과 손팻말로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기억해 달라고 말하기에 이들의 죽음은 너무 유명하다. 그럼에도 다시 이들의 이름을 꺼내어 기억하는 것은 이들의 죽음 뒤에도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7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 사람들이 납치되었던 사건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를 돌이켜 볼 때, 우리는 이들을 단지 알고 있었을 뿐,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의 숙제는 아직 풀지 못한 것 같다.
얼마 전, 한 소설가의 산문집에서 김선일의 죽음과 파병문제를 주제로 한 글을 읽었다. 소설가는 김선일의 죽음에 대하여 “나는 그저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라고 고백했다. “그의 죽음 앞에 과연 이 땅에 살고 있는 그 어떤 사람인들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래, 맞는 말이다. 같은 국가의 사람으로서 우리는 전쟁을 막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하라는 대로 군대까지 파병했으니, ‘파병국’의 국민으로서 먼 타국에서 무고한 죽음을 맞은 이들에게 미안함과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미안함과 책임감이 군대를 파병해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에게 면죄부를 줄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에 대한 미안함과 책임감에 가려 우리 자신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무고한가?
이 전쟁과 한국군 파병에 반대를 했건 찬성을 했건 상관없이 우리가 윤장호, 김선일과 이 전쟁 앞에서 같은 편에 서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들의 죽음에 미안함과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 우리가 이 전쟁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 ‘무고’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이 ‘무고’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윤장호와 김선일이 죽음을 맞은 그 때, 그 장소에서 그들은 ‘무고’한 사람일 수 없었다. 저항세력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점령한 나라를 돕기 위해 파병된 먼 나라의 군인과 자신에게 벌어진 전쟁을 기회로 돈을 벌기 위해 들어온 기업의 직원이자 파병국의 국민이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무고’한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그 때와 그 장소에서 전쟁과 침략으로 망가진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들은 ‘점령자’일 뿐이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지만,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점령자로 인식하지 않은 것은 우리 자신뿐이었다.
12월 말로 예상되는 국회의 파병연장 동의안 처리를 앞두고, 국방부 정책홍보본부장이라는 사람은 ‘신이 내린 선물, 자이툰 사단’이라는 제목의 글을 <문화일보>에 기고했다. 자이툰이 “폐허나 다를 바 없었던” 지역에서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새마을 운동 경험을 전수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신이 내린 선물”로 불린다고 한다. 심지어 2년 전에 미국의 국방장관에게 받은 칭찬까지 언급하면서, 우리가 어려웠을 때 국제사회가 ‘조건 없이’ 우리를 도와주었으니 이제 우리가 보답해야 한단다. 그러나 지난해 가을까지만 해도 자이툰은 아르빌에서 하는 일이 없고, 할 일도 없다는 언론의 보도가 나왔는데, 그가 자랑하는 그 많은 일을 어떻게 지난 1년 동안 다 이루었는지 의심스럽다. 이러한 그의 거짓말과 오만한 착각을 과연 이라크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점령을 당했던 역사가 100년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한국 사람들이 무엇이 점령행위인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참 답답한 일이다. 한국 사람들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을 좋아하기 때문일까? 일본의 총리가 신사를 참배했다는 소식에 점령의 역사를 겪어보지 못한 젊은 사람들까지도 눈에 독을 품고 비난을 퍼붓지만, 정작 우리의 모습은 비난 받는 그들을 닮아 있지는 않은지. 일본의 식민지가 된 덕택에 한국이 근대화되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다는 일본 학자의 말에 화를 내는 우리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나 한 것인지.
김선일을 살려내라고 구호를 외쳤던, 윤장호를 추모한다고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은 과연 자기 자신을 점령자로 인식하고 있을까? 전쟁과 파병을 막지 못해서 윤장호와 김선일의 죽음에 미안함과 책임감이 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점령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죽음 앞에 부끄러워야 하고 슬퍼야 한다. 전쟁을 반대한다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민중을 지지한다고 외쳤을 지라도 파병국에 살면서 사회기반시설과 서비스를 이용하고 파병국의 이름이 찍혀있는 여권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점령자’라는 이름을 벗을 수 없다.
수백만 개의 별이 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죽음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이야기가 내내 마음에 맴돈다. 내가 발 디딘 대한민국 서울의 밤하늘에 뜬 별들이 흐릿한 공기를 뚫고서 애처롭게 빛을 내고 있다.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이라도 하듯이. 지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하늘은 어떨까? 다녀온 친구는 “별이 장난 아니게 많이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가 진정 살려내라고 더 크게 외쳐야 했던, 더 많이 미안해해야 했던 억울한 죽음들 하나하나가 별이 되어 검은 하늘에 빈틈없이 박혔나 보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이라크에서 경제제재와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3백만 개의 별과 2001년부터 지금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으로 목숨을 읽은 1백만 개의 별. 당신은 수백만 개의 별이 박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하늘을 바라볼 자신이 있는가?
덧붙임
◎ 수진 님은 ‘경계를 넘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