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쫒겨 나거나 도망 나온 네팔 노동자들이랑 함께 지냈는데, 나바라즈 오빠가 농성을 하자고 했어요. 오빠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오른팔을 다쳤는데 사장이 경찰을 데리고 와서 병원에 누워 있는 오빠를 불법체류자라고 강제로 출국시키려고 해서 도망쳤어요. 오빠도, 나도 너무 억울했지만 농성하는 거는 싫었어요. 돈 벌러 왔는데 돈은 하나도 못 벌었는데 농성을 하자고 하니까 너무 싫은 거에요. 밥 먹는 것도 어려운데, 일자리도 없는데, 그러다 빈털터리로 쫒겨나면 어떻게 하냐고 오빠한테 하지 말자고 했어요. 나는 동생들, 엄마를 위해 돈 벌어야한다고, 다들 내가 돈 벌어줄 거만 생각하고 있다고. 가족을 넘어 다른 걸, 우리를 생각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만 그런 거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너무 힘들어한다는 말에 흔들렸어요. 우리가 잘 하면 다른 사람들도 좋아질 수 있을 거란 말에 농성을 결심했어요.” (먼주 타파 1994년 1월 농성 참가자)
생존을 위해 선택한 타국행이었건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꿈을 잃고 몸마저 부서진 이주노동자들이 하나둘 외국인노동자피난처(피난처, 소장 김재오 전도사)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몇 달간의 고민 끝에 1994년 1월 9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강당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산업재해를 당했지만 보상은커녕 치료비조차 받지 못한 이주노동자 13명은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고국에 돌아갈 수도, 낯선 이 한국 땅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도 없”었다며, “우리도 피와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맞아”달라고 외쳤다. 이 농성은 우리 사회에 이주노동자들의 실상을 고발한 최초의 행동이었다.
가슴에 묻어야했던 타국 땅의 설움과 분노
한국에 이주노동자가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의 경제성장이 선전되고 아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수준이 소개되면서 아시아 노동자들은 코리안 드림을 꿈꾸기 시작했다. 여기에 3D업종 기피, 제조업․ 산업 부문에서의 노동력 부족 현상이 올림픽을 전후로 완화된 출입국 규제 방침과 맞물리면서 아시아 노동자들이 손쉽게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주노동자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자 정부는 1991년 외국인 산업연수제를 도입했다. 산업연수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은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노동법상의 노동자가 아니었다. 또한 1991년 이전에 입국한 이주노동자들은 모두 미등록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1990년 초반 한국에서 일했던 거의 절대 다수의 이주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산재보험과 의료보험 등 사회복지에서도 배제돼있었다. 사업장에서의 임금체불과 여권 압수, 폭행과 구타, 욕설 역시 절대 다수의 이주노동자들이 직면한 만성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부당한 처우에 불평의 기색이라도 보이면 이들의 불안정한 신분을 악용한 ‘강제출국’ 협박과 구타가 되풀이됐고, 이주노동자들은 임금과 여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탈출을 꿈꿀 수 없는 노예처럼 살아야했다.
열쇠가 채워진 공장에서 노예처럼 일하고도 제때, 제대로 된 월급조차 받지 못하고, 이유 모를 주먹질과 발길질을 참아내며 살아왔던 이주노동자들의 설움과 분노는 결국 온 몸이 부서지는 산재를 경험하면서 94년 1월의 농성으로 폭발했다. 죽음만큼이나 두려운 빈손으로의 ‘추방’을 감수하며 시작한 투쟁은 한 달 간 이어졌다. 뜻 있는 언론들이 이주노동자들의 실태를 보도하고 나섰고, 처음에는 외면하던 시민사회 역시 문제해결을 촉구하고 나서면서 정부는 재빨리 불법 취업한 이주노동자에게도 산업재해보상보험법과 노동법을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산재보상을 받지 못하고 추방당한 이주노동자에 대한 보호대책을 마련, 이들에 대한 보상을 약속했다.
“노동부는 91년 10월부터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의 산재도 보상해왔습니다. 92년 8월까지 37명의 이주노동자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산재보상을 받았죠. 하지만 법무부가 출입국 관리법 위반을 근거로 이 정책에 이의를 가하자 92년 9월부터 이 정책은 중단됩니다. 법원은 93년 아키노 시바은(필리핀 이주노동자) 씨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산재보상 소송에서 ‘불법체류자라 하더라도 산재보상은 인정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정부 정책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94년 이주노동자들의 농성은 완강했던 정부의 산재 정책을 변화시켰지요. 농성이 일군 큰 성과였지만 곱씹어보면 씁쓸한 성과이기도 했습니다.”(박무영 전 구리노동상담소 소장)
다시 명동으로…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경실련 농성을 통해 이주노동자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지만 이는 이주노동자들의 실태를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농성이 마무리 된지 채 10달이 지나지 않은 94년 12월, 네팔 산업연수생 9명이 회사를 탈출해 피난처를 찾았다. 이들은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인력회사 수수료 1,300불을 포함, 일인당 2,000불을 들여 한국에 왔다. 고국에서 꼬박 3년을 입지도 먹지도 않고 모아야 마련할 수 있는 큰돈이었지만 한 달에 500불씩 주겠다는 약속이 있었기에 빚을 지고라도 한국에 올 수 있었다. 하지만 500불의 약속은 사기에 불과했고, 210불의 월급조차 지불되지 않았다. 여권이 압류된 상태에서 욕설과 구타를 동반한 14시간의 노동이 이뤄졌다. 결국 이들은 탈출을 감행했고, 피난처, 민주노총(준) 등과 함께 직접행동을 준비했다. 95년 1월 9일, 13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명동성당 들머리에 모였다. 스스로를 ‘한국 땅에 팔려온 네팔인 취업연수생’이라고 밝힌 이들은 몸에 쇠사슬을 두른 채 ‘때리지 마세요’ ‘우리도 인간입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살얼음 같은 추위 속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당시 호소문엔 이들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저희들은 고국에 일자리가 없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기술연수생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올 때는 우리들 가슴에 좋은 꿈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들의 월급은 인력회사가 고향으로 붙여주겠다고 압류해가기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고향에 있는 가족들은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공장에서도 매일 욕을 듣고, 폭행을 당하고, 월급도 직접 받지 못했습니다. … 저희들은 저희를 물품을 생산해내는 기계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만났고 이런 상황을 한국정부가 조직적으로 돕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저희들은 더 큰 두려움과 압박감을 느끼며 이 모순에서 탈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 이런 처지에서 우리들은 정말, 다시 우리들의 나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공장에서 계속 일할 수도 없어서 숨 쉴 수조차도 없이 그동안을 살아왔습니다. … 저희들은 비록 가난한 나라에서 왔지만 그래서 한국에서 노예처럼 당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인간존재 그 자체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 한국인과 한국정부에게 제발 저희들을 동물처럼 만들지 말라고, 같은 사람과 형제로 대접해 줄 것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95년 1월 9일 농성 호소문 중)
이들의 투쟁은 정부의 산업연수생제도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노예노동의 근거임을, 그들의 일터가 차별과 학대가 횡횡하는 인권침해의 현장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들의 농성은 94년 농성보다 훨씬 큰 사회적 파장과 거센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근로자로서의 권리를 보장하여 인권유린을 근절하겠다’는 내용의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농성단은 정부와 ▲여권반환과 자유로운 행동보장 ▲재취업보장 ▲원치 않는 잔업, 시간외 근무 강요금지 ▲업무상 질병 재해 시 보상 및 치료 ▲연수수당 직접지급 ▲미지급 임금 즉시 반환 ▲애로신고센터 설치 활성화 등 9개 사항에 합의하며 열흘간의 농성을 마무리 지었다.
최초의 이주노동자 연대조직, 외노협의 탄생
95년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했던 네팔 산업연수생들은 비록 1년 여 만에 모두 추방당했지만, 94년, 95년의 이주노동자 투쟁은 그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이주노동자의 존재를 알리고 인권유린 현실을 고발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에 많은 변화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성과는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었다.
1990년대 초기 이주노동자 문제에 주목한 곳은 인도주의적 정신을 기초한 성당이나 교회였다. 이들은 ‘약자 보호’의 정신 아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각종 지원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1993년에 이르러 상담소 형태의 이주노동자 지원 단체들이 서울과 수도권에서부터 설립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어갔지만 이들의 활동은 하나로 엮이지 못했다. 하지만 95년 1월 명동성당 농성을 계기로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운동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어졌고, 그 결과 그해 7월 명동성당 농성을 지원했던 이주노동자 단체들과 네팔, 방글라데시, 태국 등 외국인 노동자 커뮤니티 등이 함께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외노협)을 결성했다. 외노협은 최초의 이주노동자 연대조직으로, 외노협 발족은 이주노동자운동이 보다 조직적으로, 그리고 정책 및 제도 개선 등 본질적 문제에 기반 해 제기될 것임을 선언했다.
“(외노협은) 이주노동자들이 아무런 사회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극악한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를 한국사회에 등장시킨 역할, 즉 이주노동자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제기한 것 그 자체만 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성과를 냈다. 또한 95년부터 외국인 인력제도 개선을 위한 투쟁을 벌여 2003년 고용허가제의 입법에 이르는 제도개선투쟁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 점에서 외노협은 현재의 한계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운동사에서는 이미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정귀순 부산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대표. 한국 이주노동자운동의 평가와 전망)
다시 일깨어질 양심과 상식
두 차례의 농성은 벌써 15년 전의 역사가 됐다. 이주노동자 운동은 이주노동자 스스로 노조를 조직하고 직접행동에 나서거나 노동권을 넘어 시민권을 요구하는 등 매우 다양화되고 전문화되었으며, 적극적으로 변모했다. 이주노동자의 인권문제 역시 '이주노동자들만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 공동의 문제'로 성장했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이나 제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행되고 있는 이주노동자를 향한 단속과 추방은 아직도 그 추운 겨울 농성이 있던 그때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이주노동자를 향한 사회적 편견과 낙인 역시 더디고 더디게 변화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주노동자들의 외침이 잠자고 있는 우리의 양심을, 경제와 자본에 종속된 우리의 상식을 또 다시 일깨워 우리 사회를 끊임없이 진보시키리란 사실을.
덧붙임
유해정 님은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