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허영심의 발로는 아닐지라도, 나처럼 책을 절대적으로 빈곤하게 읽는 것이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책을 안 읽어도 일상에서 아무런 지장이 없고,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슈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데도 별 지장을 못 느낀다. 그 때 그 때 뉴스를 찾아보면 되니까. 심지어 책마저도, 일주일에 한 번씩 신문에 실리는 ‘신간 코너’같은 것을 찾아보는 게, 오히려 그 책을 직접 읽는 것보다 더 기억에 많이 남는 듯하다.
이처럼, 독서를 기피하는 나 역시, 한 때는 문학소녀(?)였던 시절이 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항상 손에 책이 들려있었다. 지금은 감히 쳐다볼 엄두도 안 나는 두꺼운 철학서나 장편 소설도 그 때는 1주일이면 다 읽어버릴 정도로, 독서에 대한 집중력 또한 남달랐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불철주야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책장에 꽂혀 있는 책 한권을 꺼내 읽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집인 『깊이에의 강요』였다. ‘심심풀이용으로 괜찮군!’이라는 생각을 하며 책의 제일 마지막에 실린 「문학적 건망증」이란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유감스럽게도 내가 예전에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당시 알고 지내던 한 지인이 나에게 기억하고 전달 할 수 없으면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고 이야기 했는데, 나는 기억과 전달은커녕 책을 읽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감동을 주고 인생을 뒤바꾼 책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전에 책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니, 책을 통한 감동이나 변화 따위를 꿈꿔볼 여지가 없어 보였다. 이를테면, 선배 활동가들이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이야기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나 역시 이 책을 세미나까지 해가면서 열심히 읽었지만, 지금 그 책을 보면 떠오르는 것은 여전히 그 정체가 궁금한 ‘아마포’ 뿐이다. 대학 시절 전공 수업의 리포트 과제와 시험 문제로 출제되어 거의 줄줄 외다시피 했던 『국부론』이 지금 나의 뇌리에 남긴 것은 ‘핀을 만드는 데는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 정도?
소설들에 대한 기억은 제 멋대로의 왜곡과 편집 속에서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삼형제를 ‘라틴계 정열남’(드미트리), ‘흑발 냉(冷)미남’(이반), ‘금발 온(溫)미남’(알료샤)으로 도식화 한 사람이 전 세계에서 나 말고 또 있을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주인공들이 언제나 가방 속에 넣고 다녔던 ‘흰 빵’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 『마의 산』에서는 요양하는 등장인물들이 허구한 날 먹었던 ‘고기와 샐러드와 빵과 음료가 가득한 뷔페식 식단’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을 뿐. 그래서 나는 서양 소설을 읽으면 유난히 배가 고팠는데, 문학소녀 시절의 나는 실은 독서삼매경이 아니라 독서식욕경(讀書食慾境)에 빠졌던 듯싶다.
책을 읽으면서 재미가 없었거나, 감동을 받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레미제라블』은 완역판을 다 읽은 후, 너무 감동해서 하루 종일 펑펑 울었을 정도이고, 어떤 책이든 읽을 때마다 밑줄 긋고,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기억과 감동들이 한 달 정도만 지나면, 의미고 뭐고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는 황당함을 경험하니, 어느 순간 도대체 책을 읽는 행위는 왜 지속하고 있을까 싶은 것이다.
쥐스킨트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비탄에 빠진다. 어떤 책을 읽고 감동에 빠져, 그 책의 귀퉁이에 ‘아주 훌륭하다’라고 쓰려고 봤더니, 이미 누군가 그 말을 써놓았고, 글씨체를 보니 자기가 예전에 읽으면서 이미 똑같이 써놓았던 것이다.
“그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하지만, 쥐스킨트는 이런 회의감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생각한다.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 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쥐스킨트의 고백을 읽으면서, 그러한 경험이 이제 책을 지독히 읽기 싫어하는 나에게도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맨큐의 경제학』에서 시작되어, 대학 시절 내 머리 속에 뿌리기 깊게 내렸던, 효용가치 그리고 시장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읽으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던 그 신기했던 경험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한 때 나는 책을 많이 읽는다고 자랑하는 것은 마치 “나는 한꺼번에 라면을 10개를 끓여먹을 수 있어!”라는 소리처럼 들려서 비웃기도 했었다. 특히 그러한 독서의 경험이 그/녀의 삶에서 읽히지 않을 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 각자가 가진 독서의 경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 그리고 그가 품고 있는 생각은 어느 시점에서 완성되는 것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되는 것들이며, 일상에서 우리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 변화의 기재 중 하나가 바로 독서의 경험일 것이니 말이다.
덧붙임
홍지 님은 정보공유연대IPLeft 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