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최근 거친 두 곳의 직장 모두 지하철 2호선 라인이었다. 처음엔 제 정거장에서 내리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하며 보냈다. 그러다 지하철에서 내리면 환승통로에서 심장을 부여잡고 쪼그려 앉아있는 여자애를 보기도 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한 동료에게선 “서 있는 내내 한 쪽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느라 쥐가 나는 바람에 정작 내릴 정거장에서 내리지 못 했다”는 슬픈 일화를 들었다. 내가 본 가장 슬픈 장면은 짜증이 난 한 남자가 옆 사람의 뺨을 때린 일이었다. 비키라고 했는데도 꿈쩍을 안 하자 화가 난 남자가 누군가의 뺨을 때렸고 욕설이 오가면서 지하철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래도 모든 일이란 익숙해지기 마련인지 지옥철 2년차 이젠 출근길이 덜 부담스럽긴 하다. 좁은 공간에서 내 나름의 공간 활용 능력도 생겼다. 그만큼 주위 풍경에 무관심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자꾸만 생각나는 건, 내 곤욕이 아니라 이 풍경에 대한 씁쓸함이다. 노동 천국, 출근길 지옥. 수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어딘가로 향하는 서울이란 도시의 아침 풍경은, 열정적이라기보다는 공허하고 또 맹목적으로 보인다.
지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오랫동안 자유로운 생활을 하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가 제일 못 견뎌한 것은 지하철 출근길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팔 하나 틀기도 어려운 상황이 못 견디게 싫었던 거다. 곳곳에서 낑낑대는 신음소리를 듣다 못한 그는 다들 왜 이러고 사는지 화가 났다고 했다. 글쎄 그래서 그는 이렇게 소리 질렀다. “여러분, 이건 정말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지하철 측에 전화라도 해서 항의합시다!”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뜬금없는 그의 행동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런데 반응이 전혀 없더라고. 무관심하게 쳐다보고 마는 표정들이 더 무섭더라.”
물론 그의 행동은 반응을 보이기 참 뭣하게 뜬금없긴 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리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걸 몰라서 이러나.’ 출근길의 곤욕이란 누구에게 뭐라 탓하기가 참 어려운 문제다. 어쨌든 다들 열심히 살려다 보니 생기는 문제인데, 누군가가 제동을 걸며 왜 꼭 ‘열심히’ 살아야 하느냐 하고 물어버리면 그건 그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리 답할 수 있는 질문인 것만 같다. 그래서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해? 노동을 강요하는 이놈의 사회가 문제지’라고 탓하는 말도 참 공허하다.
그런데, 나는 피로하다. 사람들은 피로하다. 그래서 아쉬운 건, 이렇게 악착같이 모두 한 곳으로 몰려가지 않아도 생활을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그걸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아니 선택하지 못 했을 뿐이다. 출근길만 겪지 않아도 내 삶의 질이 더 높아질 거란 불만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건, 바로 이런 고민에서 나오는 것일 터. 개개인의 삶은 뭐라 논할 수 없기에 차치하더라도, 도시의 출근길 풍경 그 자체가 황량해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꾸 자꾸 피로해지면 사는 게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피로한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면, 결국은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건데? 그 ‘열심히’ 라는 건 대체 무언데?
낯선 사람과의 부대낌에 마냥 친절할 수만은 없더라도 적어도 짜증 때문에 낯선 이의 뺨을 때려선 안 되지 않을까. ‘이건 아니지 않느냐’는 외침에 한 사람이 반응하고 다 같이 바꿔보자고 박수를 치는 장면을 상상을 해본다. 상상만으로도 통쾌한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네 삶의 질이 조금 나아지는 건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하며 글을 쓰는 사이 날은 어둑해지고 주말의 끝자락, 그리고 월요일. 그 어떤 날보다 피로감이 높아지는 월요일인데. 또 다시, 출근이다.
덧붙임
윤미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