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유은실은 어린 시절 자신이 멀쩡해지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써왔는지, 그것이 얼마나 힘든 고통인지를 회상한다. 엉망진창 문제투성이 일상을 감추고 마치 행복한 집안에서 살고 있는 듯 애쓰느라 얼마나 지쳐 있었나를 기억해냈다. 그리고 더는 자기 자신이 ‘멀쩡해지기 위해’ 노력하는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를 바랐다. 사실, 문제투성이 엉망진창 인생이라고 보이는 것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소중한 숨결숨결일 때가 많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나온 동화집이 바로 『멀쩡한 이유정』(푸른숲)이다. 멀쩡하지 않지만 ‘멀쩡한’ 이유정이라고 하는 역설이 주는 울림이 크다. 다섯 개의 단편 중에 <할아버지 숙제>와 <멀쩡한 이유정>을 소개한다.
<할아버지 숙제>
학교에서 숙제를 내줬다. 할아버지에 대해 조사해오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할아버지가 경찰이었다든가, 축구를 잘한다든가 하는 점을 골라 자랑해댄다. 우리의 주인공 경수 역시 할아버지에 대해 기억하려 애쓴다. 엄마의 아빠인 할아버지나, 아빠의 아빠인 할아버지나 두 분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그런데, 어떤 분이셨지?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할아버지가 다른 애들의 할아버지보다 ‘유명하지 않았을까 봐’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유명하긴 유명했는데 술 마시고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러대는 것으로 유명했단다. 머리에 난 상처도 술 마시고 ‘자빠져서’ 다친 것이다. 할아버지는 ‘경찰’이 데려다 주는 ‘주정뱅이’였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 엄마의 아빠인 할아버지는 ‘노름’을 하다 폐병으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사회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성공의 기준으로 보자면 할아버지는 멀쩡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게 보인다. 경수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그리고 다시 기억을 더듬더듬, 두 할아버지 중 한 할아버지는 우산을 잘 고치고, 노래를 잘 부르셨다. 닭고기를 좋아하고, 전쟁 때 동생을 잃었다. 또 다른 할아버지는 장동건처럼 눈이 크고, 누룽지를 좋아하고 게임을 좋아했다. 기준을 다르게 바꿔보니 할아버지가 눈앞에 잡히는 것 같다.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사람으로 그려진다.
‘훌륭하다’는 기준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훌륭하다’는 것은 사회적 기준일 뿐이지 않나. 소위 훌륭하다는 사람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일상에 있는 빈틈이 못나 보이기 때문에 숨겨야 하는가. 그럴 필요 없다. 마음 편히 숨 쉴 수 있는 진짜 살아있는 흔적이지 않나, 그렇게 숨겨진 것들을 하나씩 벗겨 보여 주는 과정이 기쁘고 즐겁기까지 한다. “우리 할아버지들 말고도 훌륭하지 않은 할아버지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라고 경수가 씩 웃어 보인다.
<멀쩡한 이유정>
유정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집을 찾아가는 것이 어려워서 2학년 동생과 함께 집에 가야 한다. 동생은 그런 누나를 귀찮아한다. 어느 날 동생이 유정이를 기다리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유정이는 덜컥 겁이 났다. 매일 동생의 놀림을 받지만, 의지할 동생이 없어 불안하다. 오른쪽 왼쪽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운데 어쩌란 말이냐. 심장이 떨린다. 불안하다.
그래도 집에 찾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가졌지 않나. 골목골목을 돌며 만난 사람들에게 ‘치연아파트’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직진, 오른쪽, 왼쪽 따위의 말들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지만, 결국 ‘치연아파트’까지 왔다. 그런데 다시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 똑같은 모양과 크기의 아파트 건물 중에서 유정이가 사는 112동을 찾아야 한다. 학습지 선생님이 오기로 한 시간이 다 돼가기 때문에 마음이 더 급하다. 102동과 104동에 갔다가, 107동까지 왔다. 112동에 다 와 간다는 뜻이 된다. 다행히 목적지가 보인다.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부른다. “유정아, 유정아”.
돌아보니, 학습지 선생님이다. 오래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다. 마치 한참이나 유정이를 찾은 것 같다. 그런데 선생님에게서 의외의 말이 나온다. “유정아, 나 너희 집 좀 데려다줘. 십분 째 헤매고 있어.”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스토리에 따르면 선생님이 헤매고 있는 유정이를 이끌어주는 것이 예상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예상을 뒤집고, 역시 길을 못 찾아 헤매고 있는 어른 하나를 넣어 주었다.
어린이와 같은 어려움을 느끼는 어른의 등장은 지금까지의 어린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틀에서 보자면 의외의 설정이다. 그 ‘어려움’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사소한 것이지만 일상과 밀착된 것이라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누군가들은 너무 쉽게 가는 그 길을 너무나도 어렵게 찾아 헤매는 두 사람! 가르치고 가르침을 배우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가진 허술한 모습을 함께 나눌 때 느끼는 묘한 동질감이 즐겁다.
『멀쩡한 이유정』을 읽고 나면 편해진다. 소개한 작품 외에도 <그냥>이라는 단편은 별다른 목적 없이 끌리는 대로 ‘그냥’ 길을 걸으며 골목에서 들리는 소리와 마주치는 장면, 물건들을 느끼고 노닌다. 속도를 강조하고, 성공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에서 ‘그냥’은 시간 낭비라 여겨질지 모르겠다. ‘자유시간’을 갖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는 어린이들이 ‘그냥’ 시간을 보내볼 수는 없을까. 그것이 마치 망가진 우산처럼 문제투성이 엉망진창이더라도 그것이 살아간다는 것 아닐까. 소소한 우리 일상 속에서 ‘그냥’이라도 좋으니 자유롭게 나를 탐색하는 것. 그것은 정말 기분 좋은 바람결 같은 행복일 것이다.
『멀쩡한 이유정』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성공담을 들려주지 않는다. 우리 생활 속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누군가 멀쩡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에 받는 상처들을 어루만진다. 끊임없이 못난 부분을 지적하고, ‘잘난’ 부분을 키우라고 강요하는 사회에서 ‘있는 그대로’도 좋다고 말해준다. 나조차도 버려두었던 내 진짜 모습을 존중하는 길을 찾는 것은, 우리가 버려두었던 우리 모습을 드러내어 보이고 멋지게 응원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그렇게, 작가 유은실은 자기 자신을 바로 우리를 “멀쩡하지 않아서” 멀쩡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덧붙임
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