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중2 남자아이가 중3 여자아이에게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는 사건이 있었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가 때리는 순간 112에 신고를 했고, 곧바로 경찰관 두 분이 센터에 오셨다. 이들은 자초지종을 듣고 나더니 맞은 친구에게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지 물었다. 경찰이 오히려 해결방법을 묻자 여자 친구는 막상 처벌보다는 둘이서 좀 더 얘기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교사와 경찰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청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폭력을 행사한 친구는 사과했고, 둘은 화해를 하기로 했단다.
<이야기 둘>
센터에 다니는 한 친구가 학교에서 친구를 때리고 돈을 빼앗아 일주일 동안 등교금지 처분을 받았다. 어찌된 일인지 물으니 자기랑 친했던 친구가 자기 욕을 하고 다니길래 화가 나서 두 대를 때리고 돈을 뺏었단다. 그 후 둘은 화해(?)를 했지만 맞은 친구의 ‘양언니’였던 선배가 다른 문제로 교사와 상담을 하다 이 사건을 얘기하여, 결국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에 불려 가게 됐단다. 그런데 ‘가해자’라며 소명 기회조차 주지 않아 결국 한 마디 변호도 못하고 과하게 처벌을 받았다며 억울해했다. 등교금지 처분을 받은 뒤 이 친구는 그나마 있던 미안한 마음조차 갖지 않게 됐단다.
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중2 남자아이가 중3 여자아이에게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는 사건이 있었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가 때리는 순간 112에 신고를 했고, 곧바로 경찰관 두 분이 센터에 오셨다. 이들은 자초지종을 듣고 나더니 맞은 친구에게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지 물었다. 경찰이 오히려 해결방법을 묻자 여자 친구는 막상 처벌보다는 둘이서 좀 더 얘기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교사와 경찰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청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폭력을 행사한 친구는 사과했고, 둘은 화해를 하기로 했단다.
<이야기 둘>
센터에 다니는 한 친구가 학교에서 친구를 때리고 돈을 빼앗아 일주일 동안 등교금지 처분을 받았다. 어찌된 일인지 물으니 자기랑 친했던 친구가 자기 욕을 하고 다니길래 화가 나서 두 대를 때리고 돈을 뺏었단다. 그 후 둘은 화해(?)를 했지만 맞은 친구의 ‘양언니’였던 선배가 다른 문제로 교사와 상담을 하다 이 사건을 얘기하여, 결국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에 불려 가게 됐단다. 그런데 ‘가해자’라며 소명 기회조차 주지 않아 결국 한 마디 변호도 못하고 과하게 처벌을 받았다며 억울해했다. 등교금지 처분을 받은 뒤 이 친구는 그나마 있던 미안한 마음조차 갖지 않게 됐단다.
엄중처벌이 만병통치약인가?
폭력이 발생하면 대부분의 경우 ‘가해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피해자’가 겪었을 일상의 고통이나 어려움, 또는 이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귀 기울이기보다는 ‘가해자’만 제거하면 폭력은 사라지는 것인 냥 엄중처벌할 것을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 지역아동센터(아래 센터)에 다니고 있는 청소년들의 사례만 보더라도 처벌이 폭력을 추방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해자에게 소명 기회조차 주지 않고 배제시키거나, 한쪽을 마냥 피해자화 시키면서 어른들이 전 과정을 대신해 주는 것이야말로 추방해야 할 폭력 중의 하나이다.
<이야기 하나>에서는 여자 친구의 적극성으로 화해하기는 했지만 둘만 해결하면 되는 문제라고 보기엔 찜찜함이 남았었다. 화가 났을지언정 난폭한 힘을 부리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주변에 있던 센터 교사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리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결국 전체 구성원이 모여 상황을 들은 후 모둠을 나눠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힘이 있는 소수가 독점해서 폭력에 대해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함께 상황을 공유하고, 성찰하는 과정이야말로 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사람을 처벌하는 폭력적인 사회
얼마 전 국회에서 ‘구걸행위 금지법’이 통과됐다. 이들이 왜 구걸을 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고 오로지 벌금이나 구류 등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는 국가의 책임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빈곤의 책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전가하는 폭력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기에 빈곤가정의 청소년들이 폭력적인 상황에 더 많이 노출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는 애, 못 배운 집 자식, 무능한 부모’라는 딱지는 마치 있는 사실을 그대로 서술한 듯하지만 실은 이런 현상을 초래한 구조적인 불평등은 숨긴 채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시켜버린다. 이런 차별적인 사회에서 빈곤가정 청소년들은 사회적 지지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보니, 폭력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하거나 왜곡된 방식으로 폭력을 받아들이곤 한다.
폭력의 유혹
때로는 폭력을 당했던 경험이 오히려 폭력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속성을 가장 잘 알도록 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이 직접 힘을 과시할 수 없더라도 센터에서 알게 된 선배나 친구와의 친분관계를 이용해서 폭력이 가진 권력을 맘껏 누리고자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이 폭력을 당하게 되더라도 그건 자신이 맞을만한 짓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센터 교사들 또한 수직적인 관계에 익숙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나이가 많거나 힘이 센 청소년에게 ‘관리자’의 역할을 부여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 위계질서는 더욱 공고해지게 된다. 수직적인 관계는 통제와 관리를 용이하게 만들지만, 결과적으로 센터의 구성원 모두를 수동적으로 만들어, 갈등이 일어나도 적극적인 해결자로 나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만든다.
익숙한 폭력과의 이별연습
사실 폭력과 영영 이별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너무나 익숙해서 이제는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일상의 폭력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 판단을 공동체가 함께 하면서 폭력을 최소화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갔으면 한다. 또한 폭력을 단순히 한 인간의 성향이나 유전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 속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야 폭력성이나 공격성을 마치 빈곤가정 청소년의 특성처럼 얘기하면서 이들을 또다시 차별하는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당장 사회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센터에서만큼은 일상에서 부당한 상황에 제대로 힘을 부려 보고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청소년들이 직접 경험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더욱이 모든 문제를 교사가 다 해결해야 하는 주체로 자신을 위치시킬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을 문제 해결의 중심에 서도록 지원해야 한다.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식, 선배와 후배 같은 수직적인 관계를 깨는 것으로부터 위계와 폭력과의 이별연습은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덧붙임
영원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