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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정치밖 정치짓

[정치밖 정치짓] ‘범죄자들’이 야당을 찍는 이유

박탈된 수형자 선거권을 보장해야

[편집인주]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데, 현실에서 우리의 정치적 권리는 얼마나 보장되고 있을까? 대선을 앞두고 후보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지금, 박탈된 정치적 권리를 찾고자 싸우는 사람들, 정치적 권리를 제약하는 각종 꼼수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 바깥에서 정치적 권리를 더 넓히기 위해 날개짓 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내가 살던 교도소가 이사하기 직전, 그러니까 작년 10월 말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가 있었다. 논쟁이 붙었을 때 내기를 붙이면 자신 없는 한쪽이 숙이게 된다는 지론을 가진 아저씨가 선거 결과를 두고 내기를 걸었다. 그런데 이때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이 아저씨에게 ‘민주당’은 정권을 잡아도 야당이고, 반대로 여당은 항상 ‘한나라당(현재의 새누리당)’이었다. 자신이 가석방을 받을 가능성도 아예 사라지고, 출소 후에도 전자발찌를 차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여당’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란다.
내가 있던 교도소에서도 바깥 사회와 다를 바 없이 조․중․동과 문화일보, 매일경제 그리고 스포츠신문을 읽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겨레나 경향신문 독자는 거의 볼 수 없지만, 이 아저씨처럼 ‘여당’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꽤 자주 보았다. 무기수이거나 자기 죄명에 ‘강’ 자가 들어가는 아저씨들은 MB정권 이후로 가석방도 힘들어지고 출소해서도 전자발찌를 착용하게 됐다며 ‘여당’을 싫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빵잡이(*)’들은 교도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언제 더 유해지고 감옥 인권이 언제 더 개선되는지를 자신의 오랜 징역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법, “무조건 짖어라”
 
이명박 정부 이후로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고 있다. 작년 겨울 나와 같은 방을 쓰던 한 아저씨가 이가 아파 치과 진료를 신청했다. 교도소에 들어오는 공중보건의 진료는 형식적이고, 무조건 뽑는 걸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던 아저씨는 외부 진료를 신청했다. 외부 진료는 보통 신청한 지 한 달 정도 지나면 연락이 오는데,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계장 면담을 신청했다. 그러자 바로 진료를 받으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웃긴 건, 기껏 어렵게 외부 치과의사를 만났건만 아저씨의 영치금으론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기에 치료해줄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내 기억으론 아저씨가 갖고 있던 영치금이 2만 원 정도였고, 치료비는 6만 원 정도였던 것 같다. 당장 아파 죽겠다는데, 4만 원이 모자라므로 치료를 할 수 없다는 말에 아저씨의 꼭지가 돌았다. 아저씨는 당장 정보공개청구를 신청했다. 과거 언젠가 구속노동자후원회 소식지를 얻어서 정보공개청구매뉴얼과 책을 늘 비상금처럼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는 나더러 문구를 써달라고 했다. 의료비에 관련한 청구를 한 것은 아니었고, 내가 보기엔 단지 공무원들을 귀찮게 하려는 목적이었는데, 어쨌든 결과적으로 며칠 뒤 정말로 교도관이 찾아오더니 “원하는 게 뭐냐?”며 아저씨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었다. “살려면 무조건 짖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아저씨는 내게 고맙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진: 2012년 4월 25일 수형자 선거권을 박탈하는 공직선거법 헌법소원 청구 기자회견]

▲ [사진: 2012년 4월 25일 수형자 선거권을 박탈하는 공직선거법 헌법소원 청구 기자회견]

 
수형자와 인권
 
짖어야만 생존의 조건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은 곧 자신이 권력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의 방증이다. 수형자는 ‘국민’에게 주어지는 선거권을 박탈당한 ‘비국민’인 존재들이다. 비국민인 수형자들은 인권을 보장받지 못해도 쉽게 항변할 수 없다. 사람이 아닌 ‘죄수’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참정권이 확대되어온 과정은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집단적 목소리를 내며 싸워온 과정이기도 하다. 서구 근대에서 인권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인간의 범주는 백인 남성 부르주아지까지였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 여성, 노동자, 흑인들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도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외치며 싸워야 했다. 한국에서 청소년 인권을 주장할 때 무엇보다 ‘미성숙(한 인간)’이란 논리부터 깨부수고 시작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수형자 선거권을 허용하지 않는 공직선거법 조항에 대한 2009년 헌재 판결에서 위헌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경미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가석방 대상자까지 폭넓게 선거권을 제한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선거제도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 위헌의견을 뒤집어 보면 ‘경미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가석방 대상자’는 괜찮지만, 중범죄자의 선거권까지 보장하는 것은 어렵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런 헌재의 논리대로라면 중범죄자에 비해 경범죄자들은 더 나은 시민이라는 뜻인가? 예컨대 양심수에게는 선거권을 줄 수 있지만 ‘일반 잡범’은 주기 곤란하다는 것일까? 그런데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악질의 인간인지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는 과연 존재하는가? 남의 돈 수십억을 꿀꺽한 뒤 3년형을 받은 이와 한순간의 잘못으로 사람을 죽이고 12년째 살고 있는 이 중 선거권을 줘도 괜찮은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이 복잡한 계산을 단칼에 정리해 “형이 확정된 수형자들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 의무를 저버린 사람들로서 공동체 운용을 주도하는 통치조직의 구성에 직․간접으로 참여토록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단정 짓는 것은 너무 단편적인 판단이다. 이런 맥락에서 수형자의 참정권 문제는 수형자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가 진짜 죄인인가
 
보편적 인권이라는 논리로 수형자 선거권을 주장하는 건 사실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연쇄 살인, 강간처럼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도 선거권을 보장해줘야 하는가? 나를 아들 같다고 챙겨주던 아저씨의 죄목은 아동성범죄였다. 같이 지낸 지 몇 달이 지난 뒤에서야 아저씨의 죄명을 듣게 됐을 땐 나도 모르게 섬뜩했다. 갑자기 아저씨 얼굴 뒤로 악마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악마처럼 보이는 수형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선거권이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관계의 사회성, 개인의 죄가 온전히 개인만의 책임인가에 대한 질문들 때문이다. 법 자체가 이미 모든 계층의 이익을 공평하게 반영하고 있지 않은 것이 문제인데, 그런 법을 근거로 죄인을 만들고 신체의 구속만으로 모자라 참정권을 제한하는 것은 기본권의 과도한 제한이다. 단순히 법의 위반 여부로 ‘죄인’이 결정된다면, 법의 처벌을 얼마든 피해 갈 수 있는 ‘가진 자’들은 영원히 무죄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고 보는 관점 역시 전형적인 그들의 논리이다. 가난은 개인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말할 때 그 사회의 불평등한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는 불가능해진다. 법치의 원리에 따라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 사회에서 배고파 빵을 훔친 장발장은 처벌을 받지만, 부자들은 빵을 훔칠 일 자체가 아예 없다.
수형자들이 단지 죄인이기 때문에 참정권을 제한하자는 주장보다는 그들과 같은 공동체 성원으로서 우리가 갖는 사회적 책임, 그리고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이야기하고 싶다. 누군가는 빵을 훔치는 유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갖는 책임 말이다. 진짜 ‘죄인’은 돈이 없어 먹을 걸 훔친 자가 아니라 그런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모종의 윤택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일 수 있다.

감옥 인권을 위해

감옥에서 억울한 일을 너무도 많이 경험했다는 아저씨가 만약 투표를 했다면 누구를 찍었을까. 과거에 그가 아무리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지금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수형자들에게 선거권이 주어진다면 그는 수형자들의 처우와 권리를 옹호해주는 후보를 찍었을지도 모른다. 언론에서 극단적으로 악마화하는 범죄자로서가 아니라 부당한 대우를 받는 약자로서의 모습이 이야기된다면 감옥 인권이 개선될 여지도 한층 커질 것이다. 대의제가 모두의 의견을 반영할 수 없다는 한계적 측면에서도 참정권의 확대는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최소한의 제도적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아저씨가 누구를 지지하든, 심지어 의회민주주의를 지지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최소한 투표할 수 있는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는 진짜 이유이다.

(*)빵잡이 : 교도소를 다녀온 사람에 대한 속칭
덧붙임

날맹 님은 집에 날아온 선거인 명부를 보며 형기종료를 실감하고 있는, 선거에 포섭되지 않는 삶-운동을 고민하나 아직은 귀차니즘에 쉬 무릎 꿇는 병역거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