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란 나라가 존재하기도 전에 이미 있었던 “빨갱이”와 요즘 한국 사회에 유행하는 “종북 프레임”이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여전히 국가는 사람들을 때리고 가두고 죽이지만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도 할 수 있구나 싶었다. 국가공권력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도 구성원들 스스로 다른 생각들을 배제하게 만들고 숙청하게 만드는 것 말이다. A급 전범으로 결국 법정에 섰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너무나 평범한 한 인간이더라는, 한나 아렌트의 경악에 찬 어려운 이론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되겠지.
영화가 끝난 후 열린 감독과의 대화 때, 4.3을 다룬 <순이 삼촌>을 쓰셨던 현기영 작가님도 함께 나오셔서 인상 깊은 말씀하나를 던지셨다. “감독은 무당이다.” 자신의 작품으로 억울한 영혼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 것이란 말씀. 난 이 말에 너무나 공감한다. 나도 그런 경험을 자주 했었다. 사람의 상처와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은 꽤나 탁월한 편이었다. 그리고 자주 그 무게가 온전히 내 것이 되었던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나도 꽤 유명한 무당이 되었을 테지.
<비념>을 보았던 날이 그랬다. 흑백 자료화면 속에서 죽어가던 당시의 희생자들. 풀리지 않을 한을 가득 담아 당시를 증언하던 어르신들. 하루하루가 전쟁터인 그리움 가득한 강정마을 풍경. 이 복잡한 영상이 뒤섞여 악몽이 되어 가위에도 눌리고……. 꿈속에서도 온몸을 떨며 기도했었다. 그렇게도 고통스럽게 내 무의식에 남아 날 괴롭히는 이것은 무엇일까.
2011년 12월 병역거부로 징역 1년 6을 선고받고 법정구속이 되었다. 나에게 국가라는 존재는 이러한 잊지 못할 기억을 안겨주었다. 수갑과 포승에 묶이는 것, 호송차에 실려 감옥 정문을 넘나드는 것, 금지물품 확인이란 이유로 속옷 하나까지 홀딱 까 보이는 것. 이것 역시 내가 몸으로 겪어내어야 했던 국가란 이름의 폭력이었다. 그것도 아주 순수하고 진한 맛의... 이후 수감생활 내내 사소한 징벌이나 경고에도 가석방이 없어질 수 있다는 둥의 압박은 나의 당연한 권리를 칼이 되게 만드는 것이어서, 끊이지 않는 갈등을 했다. 그동안 8년여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활동가로 살아왔던 시간들에 대해 끝도 없을 고민도 했다. 그 시간은 어쩌면 국가폭력 앞에 철저히 고립된 시간이었고 무의식 속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한 시간이었다. 힘들었던 기억들만큼 내 몸은 무척이나 정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14개월 만에 출소한지도 벌써 한 달하고 보름쯤 되어간다. 다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처절하게 끊어내어야 했던 인연도 있었다. 조금씩 정리되어가는 느낌이다. 다시 처음으로 내가 있던 자리로,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길은 여기에 있을 테지. 이 기억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더 파 내려가고 싶다. 하지만 두렵기도 버겁기도 끔찍하게 다시는 직면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과의 작업이기도 하다. 다만 이 작업이 나와 친구들의 트라우마를 함께 보듬는 힘의 원천이 되어주기만을 바란다.
덧붙임
홍이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