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걍 알바하고 활동도 하고..... ”
“무슨 일 하는데??”
“아... 그.. 그게......;;”
요새 누군가와 만나게 되면 진행되는 대화의 모양새다....
4월 중순부터 약 한 달자리 짧은 알바를 했다. 장소는 모 아파트 재개발 현장 시행사 사무실. 분양대금을 완납하지 않고 버티며(?) 들어가 살고 있던 세대들을 퇴거시키고 현관문을 용접해서 봉해버렸다. 그리고 그 앞엔 CCTV를 설치했다. 이 CCTV를 모니터 하는 게 내 "일"이다.
사실 내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데에는 사연이 좀 있었다. 삼촌이 이 시행사 임원으로 일하시는데, 출소한지 얼마 안 돼 멍 때리고 지내던 내게 용돈벌이 구실로 제안을 하신 거다. 당장 병원비 나갈 돈도 급했고 출소자들이 으레 겪는 무기력감과 우울감에 빠져 드는 나를 위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계기들이 필요하기도 했던 터여서 덥석 승낙하고 말았다.
근무조건만으로 보면 기간이 짧다는 것 외엔 내 시간도 비교적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고 급여수준도 상당하고 아무튼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그런 알바다. 어차피 오래 있을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나 하루 이틀 지나다 보니 불편한 구석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금씩 주워듣게 된 이 곳 상황들도 참으로 복잡했다. 재개발 부지가 크게 세 곳으로, 둘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하나는 근린공원 조성중이다. 현재는 단지 두 개 중에 한 곳은 분양과 입주가 거의 끝나가는 중이고, 다른 하나는 건축이 거의 끝나가는 단계다. 많은 재개발사업 현장들이 그렇듯, 여기도 오랜 기간 방치되어 온 국공유지와 사유지들에 터를 잡고 살아왔던, 소위 무허가 주택에 사는 주민들이 있었다. 아직 부지조성을 위한 기초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근린공원부지의 경우 180여 세대에 이르는 무허가 가구들을 내보내고 현재는 3가구가 남아 버티는 중이라 한다.
애초에 이 땅이 무허가 정착촌으로 방치되었던 시기는 일제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그 당시 소유주는 일본의 기업과 친일 인사들이었다고 한다. 해방이후 친일파 재산 국가 환수와 비롯된 소유권 다툼이 시작되며 방치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이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무허가 주거지역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여기저기 소유권이 이전되고 하는 와중에 재개발 조합이 만들어진 것도 10여 년 전이라고 한다.
사무실 안에만 있다가 딱 한 번 공원조성 공사가 한창인 현장엘 들러볼 기회가 있었다. 공원부지 한 가운데 철거대상 무허가 주택이 한 채 있었고. 아마도 산책로가 될 길가에 두 채 정도가 있었다. 또 부지주변으로도 80여 채 이상 되어 보이는 무허가 주택들이 무리지어 있었다. 아파트 입주와 공원조성이 완료되고 나면 주변의 무허가 주민들과 입주민들, 공원을 이용하는 동네주민들 사이의 마찰도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전해들은 바로는 이곳 재개발조합이 구청으로부터 사업승인을 받을 당시 조합측이 근린공원부지의 무허가 가구들을 퇴거시킨다는 조건이 있었다고 한다. 퇴거를 포함한 재개발 사업전체를 내가 알바하고 있는 시행사가 위임받아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근린공원이라 함은 그 땅이 사유지가 아닌 공유지가 아닌가. 물론 위치상으론 아파트 단지의 뒷마당쯤 되어 보이는 모양새다. 하지만 분명 사유지도 아닌 공유지임에도 구청은 민간 개발업체에 사업허가를 내주며 단서조항 하나로 삶의 기반을 흔들어 놓을 전권을 위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용산이나 홍대, 명동 등지에서 마주쳤던 얼굴들이 스친다. 그들은 그나마 세입자들이었기에 계약관계가 명확했고 강제퇴거에 맞선 싸움에도 명분이란 것이 있었다. 그러나 무허가 주택에 사는 주민들의 경우 그 곳에 정착해 살아온 기간이나 그들이 쌓아온 삶의 기반에 대한 고려 없이 모두가 범법자들로 취급되는 것이 현실이다. 단순히 안 나가고 버티는 사람들, 얼마쯤 돈 쥐어줘서 내보낸다는 식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주거권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라는 고민을 거듭하는 시간이었다.
덧붙임
홍이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