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익숙한, 적어도 한번쯤은 봤을법한 이 이미지는 페미니즘 아티스트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1989년 작품이다. 당시 낙태 여부가 남성에 의해 결정되도록 한 낙태법 철회를 외치는 여성들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과거형’ 일수 없다. 십이지간이 두 바퀴나 돌아 24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이 문구는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여성의 몸이 재단당하고 난도질 되는 것이, 그에 대한 결정권이 여성 자신에게 온전히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리고 비단 ‘낙태’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나를 더욱 분노케하는 지점이다. 아니, 차라리 처연하다고 말하는게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여성의 몸이 전쟁터로 변하는 무수히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 그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있다면, 그 시계의 여러 바늘 중 하나는 ‘외모주의’를 가리킬 것이다. 페미니즘이 등장한 이래, ‘외모논쟁(외모주의 철폐 논쟁 혹은 투쟁)’은 언제나 여성주의자들에게 큰 화두였다. 하지만, 이 치열하고 처절했던 싸움은 단언컨대, 완벽히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보인다’라고 쓰는 건, 제발 내 눈에만 그러하길 바라고 또 바라는 간절함이다) ‘여성은 껍데기만의 존재가 아니니, 외모만으로 판단하지 말라’거나, ‘여성 자신의 내적 아름다움에 더 크게 눈을 떠라’거나 하는 구호들은 날카로운 가시 넝쿨 숲에 내던져진 풍선마냥 너덜너덜 찢겨진지 오래다.
가속도 붙은 성 상품화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것에 반대하고, 외모만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 ‘미스코리아대회’에 문제를 제기하며 기획되었던 <안티미스코리아>는 참여했던 사람들의 기억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 그런 대회가 있기냐 했냐는 듯, 세상은 더 다양한 미인대회를 계획하고, 분절된 여성의 몸에 점수를 매기고, 체중감량과 성형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한다고 떠들며, 아주 대놓고 성을 상품화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게다가 이제 외모경쟁과 이를 토대로 한 ‘성 상품화’는 여성에게만 적용되지도 않는다. 10~30대 남성 연예인에게 적정한 키(절대 평균키가 아니다)와 식스팩은 기본사양, ‘여자’보다 더 예뻐지기 위한 성형수술은 옵션이며, 피부과는 제 집 들나들듯 하라고 권해진다. 몇몇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남녀를 떠나 구직자들이 가장 신경 쓰는 건 ‘외모’. 여성 구직자들의 절반 이상은 취업 실패 이유가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기업의 인사담당자 중 절대다수는 지원자의 겉모습이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한다. 그러니 외모는 스펙이고 경쟁력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다.
그런데 최근의 ‘외모주의’, ‘외모주의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여성흡연’에 대한 그것과 매우 흡사한 것 같다. 90년대 말 혹은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길에서 여성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렸었다. 이런 폭력은 여성의 흡연권 쟁취라는 거국적 투쟁을 낳을‘뻔’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참으로 애석하게도)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여성의 흡연권 논쟁이 제대로 불붙기도 전에 담배는 건강의 절대 ‘악(惡)’으로 지목되어, 성별 구분 없이 금연, 비흡연이 모두에게 옳고 바른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여성의 흡연권은 제대로 수면위에 한번 방실 떠올라보지도 못한 채 건강이라는 절대 ‘선(善)’에 발목이 잡혀 차디찬 강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외모주의’도 성별불문, 나이불문(하고 모두에게 유용한!)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이상 여성흡연권과 마찬가지의 신세가 되기 십상이지 않을까.
‘못생긴 건’ 질병?
흡연과 더불어 비만이 질병 유발자의 대열에 들어선 건 이제 상식이 될 만큼 오래전 일이지만, 사회의 미적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외모(특히 얼굴의 생김새와 크기) 또한 질병 인준을 받기 위해 대기해있다. ‘못생긴 건’ 병이다. 그래서 고쳐야 하고, 고칠 수 있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불치병은 아닌거다. 이런 사실을 극단적으로 주지시키는 한 케이블TV의 성형방송(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직역하면 ‘미인이 되자’ 쯤일까)은 시즌3까지 계속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 방송은 매회 주인공들이 겪어야 했던 외모에 의한 차별을 극적으로(재현과 주인공의 눈물, 외모 때문에 얻은 잔인한 별명을 수십번 반복하며) 보여준다. 그리고 주인공으로 뽑히기 위해 다른 참가자들과 또 다른 외모경쟁(누가 더 못생겼는지)과 감정경쟁(누가 더 못생겨서 괴로웠는지)을 벌여야 한다. 그 후 주인공이 ‘미인’의 얼굴을 얻는 험난한 과정을 보여준 후, 짜잔~하고 무대에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 모든, 그야말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한 편의 인생역전 드라마를 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의 등장에 박수를 치게 된다. ‘정말 잘됐다, 다행이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못난 얼굴로 산다는 것(특히 여성이라면 더욱더!)이 어떤 치욕과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일인지에 대한 공감은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이라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루키즘(Lookism, 외모지상주의·외모차별주의, 2000년 미국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새파이어(William Safire)가 인종·성별·종교·이념 등에 이어 새롭게 등장한 차별 요소로 ’외모‘를 지목하면서 부각되기 시작)’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생소한 것은, 새삼스레 새로운 개념이나 정의를 가져다 쓸 필요조차 없을 만큼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반증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외모는 스펙이고 경쟁력이라는 내 말이, 못생긴 건 병이라는 내 말이,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라는 내 말이. 정말 이상하지 않나? 진짜 병든 건, 작은 키, 못난 얼굴, 뚱뚱한 몸이 아니라, 그것이 질병이라고 고쳐야 한다고 말하는 이 사회 아닌가? 진짜 치료와 시술이 필요한 건, 낮은 코, 주걱 턱, 작은 눈이 아니라 그것으로 차별을 정당화하고, 외적 아름다움이 진정한 미(美)라고 가르치는 정신 나간 세상 아닌가? ‘여자는 무조건 예뻐야죠.’ 따위의 말들을 그냥 그러려니 하며 방치해온 지난 몇 해 동안 ‘외모지상주의’가 곪고 썩어 악취를 풍기기 시작하는 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 병든 세상을 치료해 정신 차리게 하지 못한다면, 수술대 위에서 흘려야 할 피가, 냉혹한 시선들에 쏟아지는 눈물이, 자괴감에 치를 떨며 버려야할 시간이. 너무 많지 않겠는가?
페미니스트들의 ‘외모논쟁(혹은 투쟁)’은 실패했다. 현재까지는. 하지만 한번 실패했다고 영원히 끝난 건 아닐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니까. 단지, 더욱 강력하고 공고해진 외모주의에 맞서기 위한 좀 더 치밀한 전략과 용기와 의지가 필요할 뿐.
덧붙임
난새 님은 언니네트워크 운영지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