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무서워서 그래? 흐흐흐”
그는 내게 어떤 상해의 의도가 없음을 말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그것에 맘 놓을 만큼 만만한 사회에 살고 있지 못한 내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말끝에 놓인 그 웃음에서 그를 보고 피하면서 약자가 된 내 행동의 상대적 결과물로써 우위를 차지한 자의 농이 느껴지기도 했다. 불쾌감에도 불구하고 아무 항변 없이 발길을 서두르는 나는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이 되기 위한 평소의 노력과 상관없이 그저 범죄의 대상화가 되기 쉬운 나약한 여성으로서의 모습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그런 위치를 점하는 선택을 했다는 것에 짙은 자괴감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여성의 자긍심을 쉽게 무너뜨리는 범죄의 대상화에 대한 불안은 단순히 내 성격적 특질로 인한 불안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폭력과 범죄가 이런 불안이 얼마나 일어나기 쉬운 것인지 입증해줄 테니 말이다.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발표한 ‘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나온 통계에 따르면,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안전하다고 인식하는 여성은 11.2%에 불과했다. 이는 여성에 대한 강력범죄 피해가 늘어나는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강력범죄(살인, 강도, 강간, 방화 등 흉악범죄) 피해자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0년 71.2%에서 2011년 83.8%로 12.6% 포인트 올랐다. 여성 피해자 수의 경우 2000년에는 6,245명이었으나 2004년에 1만 3,810명을 기록하면서 처음으로 1만 명을 넘어서더니, 2011년에는 2만 3,544명으로 4배 가까이 늘었다. 여성에 대한 범죄가 여성혐오와 여성차별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여담이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양성평등 국가’를 운운하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이야기가 얼마나 어이없는 헛소리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조은경(2004)은 ‘범죄에 대한 두려움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라는 글에서 “여성이 성폭행 등 특정 범죄에 더 취약하기 때문에 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남성보다 더 강하게 느낀다는 가설보다는 신체적 및 심리적으로 더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더 설득력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성임으로 인해서 안전의 위협을 느껴서 사회 활동이 위축되고 자기 보호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은 자신이 취약함을 확인시켜 두려움을 더욱 강화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실체적 폭력보다 그 폭력을 만들어내는 불평등한 성 구조와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여성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존감은 크게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자신의 기질적 불안이 아닌 사회가 만들어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여성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어떻게 그 불안을 싸워 이기고 당당한 여성/인간/시민으로 살아갈 것인지 고민한다. 그건 정말 오롯이 여성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Fighting back을 잘해야...
얼마 전 같이 활동하고 있는 친구에게서 성추행을 한 남자를 잡아 파출소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른 활동가들과 찾아간 파출소에서 우리는 조서를 꾸미는 긴 시간 동안 그 남자로부터 "죽여 버리고 감방에 가겠다"는 등 쏟아지는 2차 가해의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실제로 폭력을 당하는 순간 순간적 기지를 발휘하여 fighting back(자기방어)을 했다 쳐도 그게 다가 아닌 것이다. 그 후로도 이어지는 2차, 3차 가해의 장기적이고 더 심각할 수 있는 폭력을 감내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 중첩적인 폭력은 여성이기에 더욱 크게 다가오는데 성폭력 대처 이후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비난에서 볼 수 있는 여성차별적 사회 분위기와 가정 폭력으로 인한 이혼이나 방어 이후에 벌어지는 여성 살해나 폭력 등 자기 방어로 인한 결과물이 더 심각한 피해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성의 자기 방어는 이렇듯 단순한 용기 이상의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하는 큰 결심과 신념을 요구한다.
여성의 자기방어에 대한 어느 사이트는 폭력을 당했을 시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극단적 말하기로 여성들에게 강하게 대처할 것을 호소한다. 여성에 대한 범죄는 증가하고 있고 그 범죄와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죽음을 불사할 필사의 각오로 자기 방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신체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남성에 대한 대항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여성을 증가하고 있는 범죄의 대상물로 만들고 있는 여성차별과 혐오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무거운 저항이기도 하다.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사회에 대해 여성이 느끼는 불안을 성격적 특질로 인한 피해망상으로 치부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불안을 담대하고 용감하게 싸우지 못하는 나약한 여성의 개인적 문제로만 인식해서도 안 된다. 물론 여성으로서의 자존감을 높이려면 그 불안을 이겨내고 폭력에 지지 않으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머리로 알고 있지만 몇 번의 폭력에 대한 경험과 이름에서부터 ‘착한 여자’가 되도록 주문받았던 나는 폭력 앞에서 굳지 않고 당당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때론 그런 자신에게 분노한다. 그럼에도 나는 말하고 싶다. 만약 불안하고 무서워서 자기방어를 못했다면 그것은 여성인 ‘내’ 탓이 아니라 그 폭력을 야기한 주체의 문제이고 따라서 분노의 화살이 가야 할 대상도 바로 그 주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불안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여성에게 적대적인 괴물들이 수없이 존재하는 사회로 인해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가시화된 폭력이 다가 아니다. 여성들의 불안은 보이지 않는 직/간접 폭력의 상흔이다.
“여성의 안전은 여성의 범죄에 대한 공포를 포함하여 젠더 기반의 폭력(여성에 대한 폭력)을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전략, 실천, 정책을 필요로 한다.”
“Women's safety...strategies, practices and policies which aim to reduce gender-based violence (or violence against women) including women's fear of crime"
- Global Assessment on Women's Safety Prieliminary Survey Results 2007 UN-HABITAT
*참고자료
<범죄에 대한 두려움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 조은경,한국심리학회지, 2003
<불안에 떨고 불평등에 우는 한국여성> 서울신문, 오세진, 2013-6-28
*이미지 출처
http://truth-out.org/news/item/11196
덧붙임
무다 님은 언니네트워크 운영지기(likeweeds@naver.com)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