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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여성을 '보호'하자고?

[인권으로 읽는 세상] 여성의 분노, '편파수사' 때문만일까

얼마 전 술자리에 함께 한 친구가 화장실 가기를 머뭇거렸다. 남녀공용에다 그다지 청결하지 못해 지저분한 게 신경 쓰이나 싶었는데, 걱정의 이유는 몰카였다. 요즘은 화장실 구멍 안에까지 몰카를 설치한다면서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얘길 했다. 그날 이후 공중화장실에 붙어있는 '몰카는 범죄'라는 스티커가 달리 보이며 궁금해졌다. 남성화장실에도 저 스티커가 붙어있을까? 몇몇에게 물어보니 아니란다. 주 피해자인 여성들은 몰카가 범죄라는 걸 이미 아는데 그 스티커가 전하는 메시지는 뭘까 싶었다. '여성이라면 당신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알아서 조심하라.' 몰카가 범죄라는 경고 메시지가 전해져야 할 방향으로 제대로 향해있는 걸까 의문이 생겼다. 

분노한 여성들이 모였다  

5월 1일 한 인터넷 사이트에 누드크로키 수업 중 찍은 남성 모델의 몰카 사진이 올라왔다. 피의자를 10일 검거하고 12일 구속하며 사법당국은 그동안 숱한 몰카 사건에서 보이지 않은 신속한 대응을 보였다. 이에 그동안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었음에 분노하며, 19일 1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거리에 모였다. 이번 사건을 비롯해 최근 드러난 성범죄 사건들과 관련된 청원에 21일 경찰청장과 여성가족부장관의 답변이 있었다. 편파수사 논란에 대해 높은 검거율을 내세우며 자랑과 변명에 그친 답변에 분노한 여성들이 26일에도 다시 모였다. 

디지털 성범죄는 기존 음란물이나 포르노가 가해자 시점의 표현으로 피해자를 왜곡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만들어진 용어다. 디지털 성범죄는 제작, 유포, 참여, 시청으로 분류할 수 있는 행위들이 결합하여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일반적으로 범죄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성된다.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범죄가 발생되고 확산되는 것을 피해자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012년 2000여 건에서 2017년 6000여 건으로 디지털 성범죄는 급증해왔다. 불법촬영 범죄의 증가 그 자체도 문제지만, 이것이 무작위로 전파돼 언제든 누구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피해는 더 심화된다. 불법촬영을 한 가해자만이 아니라 그것을 '소비'하면서 연루되는 수많은 가해자들이 있다. 만들고 퍼뜨리고 소비하며 전 과정에 걸쳐 촘촘하고 견고한 범죄 '카르텔'이 형성되는 것이다.  

소위 야동 사이트가 아니더라도 여성에 대한 무수한 몰카 동영상을 지금 이 순간에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직업 불문 나이 불문 장소 불문하고 몰카 범죄를 행하는 이들에 대한 뉴스는 반복되며, 몰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각종 대처법이 떠돌고 몰카 금지 응급 키트마저 등장했다. 언제든 어디서든 몰카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여성들의 불안과 공포는 여성들이 느끼는 것보다 늘 하찮게 여겨져 왔다. 지난 여름, "더위만 피하지 말고 범죄도 피하세요"라는 제목의 경찰청 범죄예방 포스터가 논란이 됐다. '스스로 조심하라'는 메시지는 가해자를 삭제한 채 피해자에게 범죄 발생의 책임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몰카 피해를 호소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며 범죄 '카르텔'이 어떤 흔들림도 없도록 사법당국은 오히려 기여해왔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위협되는 일상, 지금 거리로 분출된 여성들의 분노는 오랜 시간 누적되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불안과 공포와 맞닿아있다.

같은 행위라고 '동일범죄'라 할 수 있나  

거리를 메운 여성들은 "동일범죄 동일처벌"을 외쳤다. 노동의 대가가 성에 따라 다르게 취급되는 것을 문제 삼으며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 지금껏 계속되나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요구가 떠오른다. '동일범죄 동일처벌', 너무도 상식적이어서 오히려 복잡한 심경이 드는 이 요구를 곱씹다가 질문이 생겼다. 동일한 범죄 행위를 동일하게 수사하고 처벌해야 하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경찰청장도 '동일범죄 동일처벌'을 원칙으로 공정하게 수사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저 행위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동일범죄'라 할 수 있을까. 

누드크로키 몰카 사건의 피해자는 남성이었다. 성별에 따라 범죄로 인한 고통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성적'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디지털 성범죄는 '디지털 테러'라고 지칭될 만큼 삶을 파괴하는 심각한 범죄로 반드시 근절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동일범죄'라 하더라도 사건에 따라 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다르다. 강남역에서 살해당한 여성을 추모하며 여성들은 "여성이라서 죽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최근 이슈가 된 누드크로키 몰카 사건의 피해자가 남성이고, 몰카 범죄로 인한 남성 피해자가 2012년 53건에서 2016년 160건으로 늘어나는 추세라지만 "남성이라서 찍혔다", "나도 찍힐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라고 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폭력 성범죄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서 여전히 여성은 사회적 약자다. 이런 현실에서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범죄는 피해자에서 그치지 않고 여성들을 위축시키며 불안과 공포를 일상화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지금 여성들의 분노는 동등하지 않은 존재였음에 대한 분노다. 동등하지 않은 사회에서 동일한 접근과 동일한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동일범죄 동일처벌" 외침은 단지 똑같이 취급하라는 것을 넘어 동등하지 않은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다. 

'보호'에 기댄 안전은 권리가 아니다  

여성들은 끊임없이 모이고 말해왔다. 2015년 소라넷 폐쇄를 요구하며 사이버 성폭력 문제의 물꼬를 트고, 2016년 강남역 살해사건이 단지 '묻지마 범죄'가 아닌 여성혐오 범죄임을 제기하고, 2018년 미투 운동에서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성폭력의 경험을 드러내면서 변화를 이끌었다. 정부의 변화도 엿보인다. 작년 9월 정부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 방지 종합대책'을 발표했고, 4월 30일부터 여성가족부 산하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의 운영을 시작했다. 대선을 앞두고 '몰카, 리벤지 포르노 완전 근절'을 공약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4일 "몰카 범죄, 데이트 폭력 등은 여성의 삶을 파괴하는 악성 범죄"라면서 중대한 위법으로 다룰 것을 주문했다. 부차화되고 개별화됐던 성폭력 성범죄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제자리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주요사건이 있을 때마다 정부가 내는 대책은 형태만 다를 뿐 유사한 관점에서 마련된다. CCTV를 확대하고 남녀 화장실을 분리하고 안심귀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등 여성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 안심사회'를 구현하겠다며 보호자를 자처하는 국가에서 대응책을 구상하고 집행하는 이들은 여성혐오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성 안심사회는 도래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보호에 의지하여 지켜질 수 있는 안전이라면, 그건 이미 안전하지 않은 사회라는 방증이며 그 사회에서 안전은 권리일 수 없다.  

여성혐오 사회로부터 '대전환'해야  

남성 모델 몰카가 전사회적 주목을 받을 때 비슷한 시기 발생한 여고 기숙사 몰카는 불법 동영상 사이트에서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등 상황은 확연하게 대비됐다. 성범죄 강력대응을 수사당국에 촉구하며 문재인 대통령은 성차별적 사회를 바꾸기 위한 대전환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호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성적 소비의 대상이 되는 여성의 위치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대전환은 불가능하다.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으면서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반여성적 인식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은 채 제자리를 지킬 수 있고, 미투 운동으로 드러난 성폭력 가해자들에 대한 불구속 결정이 면죄부인 냥 이야기되면서 피해자에 대한 화살로 돌아가고, 여성의 몸을 집요하게 전시하고 클릭을 유도하는 것이 광고수입으로 용인된다. 지금 요구되는 대전환은 바로 여성혐오 사회로부터의 대전환이다. 

"안전귀가 하세요." 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여성들이 서로에게 건넸던 인사였다. 지금 거리에 모인 여성들이 일구려는 것은 국가의 보호에 기대는 것이 아닌, 여성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권리로서 지킬 수 있는 사회다. 여성'보호'를 넘어 여성이 권리의 주체로 성평등한 공간과 관계를 구축해갈 때 대전환의 길이 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