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처벌 남발 대신 아동여성 인권 보장체계 마련하라
사형집행 재개, 전자발찌 확대는 아동·여성의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최근 법무부(장관 이귀남)는 강력사건들을 빌미로 사형집행 추진과 보호감호제 부활, 전자발찌 소급 적용 등 권위주의적 형사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강력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 조치를 내 놓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현재 정부가 발표하는 일련의 조치들은 근본적 처방인 성폭력 범죄 예방과 해결을 위한 우선 과제 해결책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사후 처벌 대책만을 남발하는 것은 아동 여성 등에 대한 인권보장 체계를 시급히 정비해야할 정부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조치들은 그동안 우리사회가 오랫동안 숙고와 논의를 통해 만들어온 모든 법률적, 인권적 성과들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부의 흐름이 지방선거를 앞둔 현재, 국민 불안을 이용하여 ‘치안논리’로 새로운 공포정치를 의도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국민 인권보장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함으로써 인권보장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성범죄는 여성 및 아동에게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큰 피해를 주는 반인권적이고 반드시 근절되어야 할 범죄이며 가해자는 엄격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아동의 인권 보장은 사회의 중요한 의무이며, 아동의 권한 강화라는 맥락에서 아동에 대한 특별한 지지와 지원,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고 있는 사형제 재개, 전자발찌 확대, 보호감호제 부활 등으로는 아동·여성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가해자 중심의 처벌강화 논리가 판을 치면서 정작 어린이와 여성 등의 인권을 증진시키고 성범죄 예방을 위한 정책 수립 및 교육, 피해자에 대한 지지와 지원 등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주목 합니다.
또한 가부장적인 질서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성인 여성의 성폭력의 본질은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성폭력은 단지 특정한 싸이코 패스라는 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폭력은 곳곳에서 일어나며, 단순히 처벌을 강화하는 것을 통해 막을 수도 없습니다. 특히 정부여당이나 보수언론에 의해 성폭력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분노를 부추기는 방식은 더더욱 성폭력 예방을 어렵게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성폭력 예방과 방지를 위해서 여성·아동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인권보장체계를 튼튼히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에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는 또한 가난한 지역의 치안이 심각한 처지에 놓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우리사회는 ‘치안’조차도 양극화 되어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작 늘려야할 치안 수사 인력은 보강되지 않고, 시국사범에 대한 무차별한 사찰과 감시, 통제 예산만이 늘어나는 것도 문제의 원인입니다.
우리는 이번 부산여중생 사건과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통해 치안대책, 아동 여성에 대한 인권보장 체계 구축 등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사회안전망 구축이 시급한 일임을 자각하며, 이에 따라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발표하고자 합니다.
[기자회견문]
사후 처벌 남발 대신 아동․여성 인권 보장체계 마련하라
사형제, 전자발찌 확대는 아동·여성의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폭력을 비롯해 아동과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말하기에 앞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머리와 마음 한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은, 폭력으로 자기 삶의 존엄을 위협받는 아동과 여성들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법무부 및 경찰과 정치인들은 전자발찌 소급 적용, 사형집행 추진, 보호감호제 부활 등 반인권적 형사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부산 여중생 살인사건 이후 온 국민이 분노와 불안에 떨고 있는 지금, 정부가 발표하는 일련의 조치들은 오히려 아동 여성 등에 대한 안전과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범죄자에 대한 올바른 처벌은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동과 여성들이 성폭력을 비롯한 폭력의 위협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충분한 지지와 엄호를 받는 환경과 사회적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성인 여성은 물론,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하여 인권침해에 취약한 계층이 성폭력 상담과 지원/훈련을 받아 자기 강화(self-empowerment)를 이룰 수 있도록, 지역에 튼튼하게 뿌리내린 사회적 지원 체계를 수립하고 강화해야 한다. 또한 성폭력을 겪은 모든 여성들이 상처를 치유, 극복하고 존엄하게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충분한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지원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수면 위로 드러나는 사건들뿐만 아니라, 수면 아래에서 수많은 가부장들이 뻔뻔하게 저지르고 있는 광범위한 성폭력을 중요한 인권문제로 다루고 적절히 처벌, 교화해야 한다. 특히 사회적 지위를 안전망 삼아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가하고도 처벌조차 받지 않는 자들을 예외 없이 처벌해야 한다. 남성들이 어릴 때부터 여성과 다양한 성정체성을 존중하고 스스로 발현할 수 있도록 인권교육을 받는 것도 시급하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모든 여성들이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일이며 반성폭력운동이 요구해온 일이다.
그러나 그동안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교정 당국은 성폭력 범죄자가 복역하는 동안 자신의 잘못을 마음깊이 반성할 수 있도록 고려된 교화 프로그램을 마련했는가. 인생의 대부분을 교정시절에서 보내고도 다시 살인을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정부당국은 책임이 없다는 것인가. 오히려 경찰은 성폭력을 겪거나 위협을 받는 여성들이 신고할 때 자신들은 권한이 없다며 발뺌하거나, 마지못해 수사하는 실정이다. 오히려 수사 과정에서 피해여성에게 모멸적인 2차 가해를 하기도 한다. 수많은 여성이 성폭력으로 고통받고 살해당하는 동안, 촛불 든 국민들을 겁박하기 위해 총동원되던 그 가공할만한 경찰력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보안’경찰에 쏟는 정성에 비해 ‘치안’경찰에 쏟는 정부의 노력은 어떤 것이 있었는가.
정부는 그동안 정부책임에 대한 성찰과 반성 한마디 없이 가해자에게 처벌을 강화하는 방침만을 내 놓고 있다. 이것은 마치 극악한 범죄자 몇 명에게 전자발찌를 채우고 보호감호를 하는 것만으로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고 국민을 속이는 행위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았으면 좋겠다는 국민들의 간절한 마음을 이용해, 그동안 우리 사회가 숙고해서 마련해온 모든 법률적, 인권적 성과들을 원점으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러한 정부의 흐름이 지방선거를 앞둔 현재, 국민 불안을 이용하여 ‘치안논리’로 새로운 공포정치를 의도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정부는 국민 인권보장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함으로써 인권보장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물론 형벌을 강력하게 강화하자는 일부 주장에 사람들의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주장에 우려하는 우리조차도 만연한 폭력은 공포스럽고 불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가가 도모하고 조장하는 ‘공포정치’로 모든 여성들이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성폭력이 자라나는 토양인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통념과 편견을 뿌리 뽑기 시작하는 일이 시작되지 않는 한, 불안은 항상 있을 것이며 오히려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인권’은 아동과 여성의 시선으로 요구되어야 한다. 인권에 젠더적 시선을 담아 아동과 여성의 인권 보장을 위한 체계가 바로 우리 모두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동시에 특정한 계층의 인권침해를 담보로 이루어지는 인권보장체계란 있을 수 없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동과 여성이 가부장적 시선 아래 짓눌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국가는 반인권적 형벌 강화 논란으로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성찰의 기회를 박탈하지 말고, 아동과 여성의 자기 강화와 인권 보장을 위한 체계 마련에 착수해야 한다.
2010년 3월 22일
기자회견 참석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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