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주> 20주년을 맞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다시 변혁을 꿈꾸는 인권운동의 질문을 담아 책자를 발간했다. <인권오름>은 그 중 '도란거리다' 장에 실린 글의 일부를 몇 차례에 나누어 싣는다. 일상, 관계, 활동 속에서 어제의 고백이기도 하고 내일의 다짐이기도 한 사랑방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인권오름> 독자들에게도 든든한 기운으로 전해지기를 바란다.
20주년을 맞아, 인권운동사랑방은 작년부터 기나긴 논의를 시작하였다. 사랑방이 지난 20년 동안 해왔던 일을 짚으면서, 앞으로 사랑방이 해봤으면 좋을 활동들에 대해서 머리를 맞댔다. 사랑방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시작된 20주년 논의는, 이건 뭔가 싶을 정도로 사람 진을 뺐다. 얼마나 논의를 잘 해왔는지, 제대로 방향을 잡았는지 묻는다면 그리 자신은 없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사랑방 20주년 행사 ‘회동’에서 발표하려는 우리의 고민들은 인권운동, 사랑방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한국 사회 아니 세상을 바꾸고 싶은 ‘운동’의 관점에서 제기된 것들이다. 그래서 논의 과정에서 가장 지겹게 반복되었던 단어는 ‘변혁’이었다. 인권을 더욱 대중화하고, 전문화하자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은데, 그러려면 우리가, 인권운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고 또 물었다.
내 한 몸이라도
내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하였다. ‘체제를 변혁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런 운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샤방샤방한 인권운동에서 체제 변혁을 고민해야 한다니, 사랑방이 이런 곳이었나?’, ‘이런 게 답이 있겠나? 그냥 열심히 사는 거지.’ 등등. 평소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어느새 잊힌 물음들부터 회의감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세상과 사람들을 제대로 알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고 세상을 정말로 바꾸려는 운동이라면 모름지기 어때야 할지 항상 궁금해 했던 것 같다.
한때는 함께 하는 사람들과 열심히 운동하면 그게 변혁운동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생각이 발전해 운동과 조직을 동일시하였다. 그러다가 조직에서 자유로워지자, 운동과 이념을 동일시하였다. 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주의’들이 운동이 되었다. 그때쯤이면 거창한 변혁운동은 언감생심이고 내 한 몸이라도 견결하게 살아보자는 심산에 이념과 양심에 따라 병역거부를 하고 감옥에 갔다.
감옥에서 다들 왜 병역거부를 했느냐고 묻는데, 내가 수감되기 전 기자회견에서 밝힌 병역거부이유서의 이야기들을 할 수 없었다. 그건 정말 기자회견장에나 어울리는 언어였다. 나도 모르게 ‘그냥 좋지도 않은 군대 가느니, 여기 온 거죠.’라고 얼버무렸다. 그러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하긴 뭐, 군대나 여기나 그렇지.’라고 맞장구를 쳐준다. 물론 나이도 어리면서 나가면 어쩌려고 전과자 딱지를 붙이느냐는 걱정은 꼭 따라왔다. 군사주의니, 위계 사회니, 자아가 사라지고 조직의 부속품으로만 남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굳이 하지 않아도, 적어도 군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명하고 윤리적 근거까지 갖춘 것처럼 보이는 운동의 요구들은 사람들이 잘 몰라서 가로막히는 게 아니었다. 모두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동원해서 현실의 장애물을 피하고 넘어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그런 노력들이 결코 장애물을 없애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감옥의 동료들에게는 나의 병역거부 역시 그런 노력 중 하나로 읽혔을 것이다.
폐쇄회로처럼 맴돌았다는 생각이
수감생활을 통해서 어쩌면 처음으로 세상에 대해서,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 같다. 그 전에 그들은 나에게 한낱 대상일 뿐이었다. 나를 그 속에 적극적으로 연루시키기보다는, 한 발 떨어져 내 눈앞에 있을 뿐인 대상 말이다. 그들이 어떻게 듣는지보다 내가 볼 때 괜찮다 싶은 말들을 외쳤다. 세상을 바꾸자면서 누군가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하지만, 그 제안이 받아들여질 거라는 기대는 그리 하지 않았다. 운동의 언어가 유통되고 평가받는 자리들이 있다. 집회, 기자회견장, 자료집, 온라인 소통 공간 등등. 폐쇄회로처럼 내 운동은 그 안에서 맴돌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글과 머릿속에만 있던 세상과 대면하고서 나는 당황했던 것 같다. 사람들 사는 걸 좀 더 겪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곳에 가서 지역 주민단체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자리, 보육, 의료, 활동보조와 같은 사회적 자원들을 제공하고 연결하는 일은 이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건 현실이었다. 정말 현실이라서, 거기서 비집고 나갈 틈을 찾기조차 쉽지 않은 그런 현실 말이다. 사회복지 전달 체계의 돈과 언어가 꽉 잡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매개자이자 공급자 역할 이상을 하기 어려웠고, ‘운동’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런 나에게 사랑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작된 20주년 논의는 반가운 것이면서도 별로 답이 없어 보이기도 하였다. 그래도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고, 그걸 세상에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를 골몰했던 인권운동이, 체제 변혁을 꿈꾸며 풀어놓는 고민들은 분명 내 오래된 생각과 만나는 것이었다. 세상과는 담을 쌓은 채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반복하는 운동도 답답하지만, 소위 현실에 압도당해 운동이길 포기하게 되는 것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체제를 늪이나 부처님 손바닥 같은 것에 비유하고 싶다. 제대로 발목 잡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거나, 자신은 자유로운 것 같지만 결국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체제’가 아닐까? 사람들에게 그런 ‘체제’가 뭐냐고 물으면 먹고 사는 문제를 가장 많이 답하지 않을까? 자유가 넘쳐난다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피곤해도 어김없이 출근하게 만드는 그 체제. 더럽고 서러워서 직장을 때려 치워도 결국 자영업 또는 전문직(프리랜서)으로 또 다른 노동관계망에 걸릴 수밖에 없는 그 체제 말이다. 그렇게 ‘자본주의적 노동’이 사회에서 사람들이 맺는 관계와 활동의 일반적 형식이자 생존수단이 되면서 사람들은 자원을 총동원해 경쟁과 적대, 차별과 배제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고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짐짓 모든 사람은 피부색, 성별에 상관없이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이야기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자원과 무기로 활용한다.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감옥에서, 지역에서 내가 경험한 ‘현실’을 풀어쓴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세상을 바꾸려는 운동이 이런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건네고 행동해야 할지에서부터 출발하는 것, 그래서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서로 끌어주는 관계를 조직하는 것, 부처님 손바닥을 뒤집을 수 있는 집단적 힘을 만들어내는 것, 나는 그게 인권운동사랑방이 가려는 길이라고 이해하였다. 바로 그게 우리 앞에 반월·시화공단 노동자 조직화라는 과제로 놓여 있다. 거대한 공단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은 철저히 개인으로서 생존경쟁 중이다. 시급 10원이라도 더 주는 곳으로, 작업 물량이 조금이라도 더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그래야 한 달에 필요한 생활비를 벌 수 있다. 아이가 아파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도 지금 돈을 벌 수 있을 때 벌어놓아야 한다. 여기서부터 인권운동사랑방은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려고 한다.
덧붙임
정록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