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너가 알바 가다가 현기증을 일으켜 쓰러졌다. 파트너가 일하는 곳에서 같이 일하는 분이 파트너를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파트너는 나를 부르면서 내가 엄마라고 그 분께 말씀드렸던 모양이다.(파트너와 나는 나이 차가 꽤 된다.) 병원에서 OO의 어머니 되시냐고, 파트너의 정보를 얘기해주는 그 분의 모습이 꽤나 생경했지만, 딱히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간호사나 의사가 더 캐묻지 않는 것이 감사한 순간이다. 보호자라는 편리한 단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파트너가 심각한 상태였다면, 더 둘러댈 만한 거리들을 생각해두어야 할 게다) 결국 그 분이 파트너의 정체성을 알아내면서 어색한 순간들은 끝이 났다.
다른 사람들이 너무나 편하게 가져오는 의미 체계 속에 속해 있지 않음을 느끼는 순간이 생경할 때가 많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순간도 제법된다. 되도록이면 커뮤니티 외 타인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는 순간들을 차단하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다 차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궁금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미 체계를 동원하면서 상대를 파악하려는 순간들이다. 쇼핑을 가든 산책을 하든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든 누구와 같이 다니고 누구와 함께 사는지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물건을 살 때마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 누구인지, 사람들이 같이 다니는 사람이 누구인지 굳이 파악하려는 이유가 궁금하다. '누구'와 '왜' 사는지에 대한 (대외적) 의미를 정해두지 않았으니 물을 때마다 하는 대답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때로 힘 빠지는 순간은 나나 내 주변의 관계가 다른 이에게 어떤 식으로든 해독된 다음 내가 속한 공간이 지옥이 되는지 아니면 천국이 되는지가 철저히 '그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여겨지는 순간이다. 커밍할 의미가 없는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퍼질 수도 있고, 때로는 잘못된 말들이 전달될 수도 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주변에 많으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부분도 많다. 나는 내 공간이나 내 관계에 대해 온전한 통제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는 퀴어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나, 경험이 없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때로는 그냥 물 흐르는 듯이 사람들 간의 순간이 흐르기를 바라는 것이 내가 바라는 최대일 수도 있다.
주변인에게 커밍을 한다는 것은 나를 당신의 공간에 안전하게 맞아달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그걸 커밍 대상자 자신의 공간에 대한 안전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꽤 된다. 여기 다른 사람들은 위험할 수 있으니 자기 자신 이외에는 커밍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자신의 공간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이 때로는 상대에 대한 배려로 둔갑한다.
덧붙임
토리 님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이반스쿨 소속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