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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호의 인권이야기] 다시, 노동자들의 행진이 시작된다.

기륭 비정규직 노동자 10년 투쟁은 비정규직이 얼마나 반인간적 범죄행위인지를 보여줬다. 1,895일간의 투쟁, 94일간의 단식 등 잔인한 숫자로 채워진 10년의 시간은 비정규노동의 본질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반쪽짜리 인간으로 노예의 노동을 하다 버려 지거나, 가열한 투쟁으로 승리를 해도 갈 곳이 없는 완벽한 절망. 이 절망을 넘고자 쉽지 않은 결정과 선택의 시간을 보낸 기륭 노동자들은 배밀이, 오체투지를 선택했다.

오체투지는 몸은 가장 낮게 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하겠다는 절박한 기도다. 그러나 그 기도는 대통령과 정부, 국회를 향하지 않았다. 가장 절박한 이들이 낮은 곳에서부터 맨 몸으로 새로운 길을 내자는 손 내밂이었고, 지렁이 거북이처럼 더디더라도 수많은 이들과 함께 다시 일어서자는 간절한 기도였다. 한 자리에 머물러 고여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길이 되어 물꼬를 트자는 간절함의 실천이었으며, 대법원의 판결을 지켜보고, 정치권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우리의 배밀이로 길을 열겠다는 행진이었다. 이런 마음들이 모였기에 오체투지는 흔한 구호 하나 외치지 않고, 어떤 물리력도 사용하지 않고서도 역동적이고, 힘 있는 행진일 수 있었다.
[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굴뚝과 땅바닥 사이

기륭의 오체투지를 이은 것은 쌍용자동차, 콜트콜텍, 스타케미칼을 비롯한 정리해고 노동자들이었다. 파업, 단식, 고공농성, 미국·일본 원정 투쟁, 음악회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반인륜적이고, 비인간적인 정리해고와 비정규제도에 맞선 노동자들이 앞에 섰다. 죽는 것 빼고 다 해봤다는 말이 무색한 26명의 상주들이, 대법원이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 최소한 사법정의는 살아있을 것이라는 바람이 산산이 부서진 이들이 다시 땅바닥을 기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라는 법제도 자체를 없애지 않는 한, 굴뚝으로 내몰리고, 냉기가 도는 땅바닥을 기고, 하루하루가 아슬아슬 할 수밖에 없음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땅바닥을 기는 노동자들을 보는 것은 아프다. 5일간 걸어온 길은 어디 하나 만만치 않다. 도로의 요철은 무릎과 팔꿈치로 파고들고, 하수구 냄새와 오래된 담배꽁초, 얼어붙은 침과 가래는 우리를 모욕한다. 빵빵거리는 경적소리와 우리를 막아서는 형광색 옷을 입은 공권력은 우리를 비웃는다. 그러나 그 5일은 노동자들이 싸워왔던 그 세월이 준 모욕과 아픔만 하지는 못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라는 테러가 짓이겨 놓은 우리의 삶과 일상이 땅바닥을 기는 5일보다 더 아팠다.

땅콩회항과 ‘갑’질의 배후

노동자들이 땅을 기고, 굴뚝에 올라도 바뀌지 않는 것은 자본이 노동을 대하는 태도다. 땅콩회항으로 대표되는 ‘갑’질의 횡포. 그 본질은 노동에 대한 천시에 있다. 말 한마디면 해고할 수 있고, 재계약 앞에서 벌벌 떠는 노동자들이 ‘갑’의 눈에는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박힌 ‘말 한마디면 노동자의 고용과 삶에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통념은 다시 노동자의 존엄을, 인격을 짓밟는다. 이 통념은 고용관계 속에서, 재벌들이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현실 속에서 만들어진다. 한국의 10대 재벌 계열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119만 6천명이다. 이 중 비정규직은 44만 명, 그 중에서도 간접고용 비정규직은 36만 명이다.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할 재벌들이 앞장서서 간접고용을 조장하는 사회.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노동자들을 양산해내는 구조가 땅콩회항의 배후다.

재벌들의 배후에는 정부가 있다. 작년 12월 정부가 발표한 <비정규직종합대책>은 계약기간 2년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4년으로 늘리고, 정리해고 요건을 완화하며, 쉬운 해고를 통해 정규직이라는 모래성을 부수겠다는 선언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고, 노동시장 구조개혁이라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재벌 및 기업들에게는 규제완화와 사면, 세금감면 등의 자비를 베푼다. ‘규제기요틴 민관합동회의’를 통해 정부는 재벌들의 곳간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목에 단두대를 들이대겠다고 밝혔다. 사내유보금 500조라는 천문학적인 재벌들의 곳간을 지켜주겠다는 선포했다. 물론 그 속에 노동자들의 권리와 생존은 없다.
[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다시 땅바닥을 기지는 않겠다

끝없이 질주하는 재벌과 정권의 '갑'질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모여 만들 힘이다. 두 차례의 오체투지는 그러한 힘을 만들자는 다짐이었다. 열흘간 배밀이로 걸어오면서 이 길이 또 다른 길, 박근혜 정부의 정리해고 요건 완화, 비정규직 사용기간 연장이라는 광폭한 테러에 맞서고, 뿌리로부터 일어나는 저항의 길이 되기를 바랐다. 이들의 다짐에 응답하는 또 다른 행진이 2월 5일부터 시작된다. 이번에는 재벌의 ‘갑’질에 고통 받는 간접고용노동자들이 주인공이다.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의 설치수리기사들이 행진에 앞장서겠다고 밝혔고, 삼성전자서비스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동자들도 함께한다. 1,2차 오체투지 행진에 함께해 온 기륭전자,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도 함께한다. 재벌을 위해 쉬운 해고의 문을 열려는 정부에 맞서 정리해고 노동자들도 이 행진에 함께 한다.

이제 이미 익숙한, 그러나 전혀 새로운 길을 떠나보려고 한다. 이제 다시는 땅바닥을 기지 않겠다. 저들의 질주에 비하면 느린 발걸음이겠지만 막연히 기어 다닐 수는 없다. 우리는 일어나서 걸을 것이다. 자본에게 농락당하고, 법원에게 배신당하고, 경찰에게 모욕당하지 않을 것이며, 공권력이 처 놓은 장벽과 선을 넘나들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길, 사람을 지키는 길을 택한 노동자의 곁에 많은 시대적 양심과 따뜻함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이번 행진은 정리해고-비정규법제도 전면폐기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하는 행진이며, 고통 받는 노동자들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끌어안을 더 큰 행진이다.
덧붙임

오진호 님은 비정규직없는세상 네트워크 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