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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유혹] “동료가 되어 함께 진실에 다가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읽고

416세월호 참사 작가기록단이 두 번째 기록을 내놓았다. <다시 봄이 올 거예요>라는 제목이다. 세월호 생존학생과 형제자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적어놓은 이 책은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제3자적 시선에서 벗어나 그들의 ‘오늘’을 들여다보기. 우리는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의 다수가 고등학생이라는 점에서 ‘꽃다운 죽음’, ‘미처 꽃 피우지 못한 어린 생명의 소멸’이란 표현을 종종 하곤 했다. 이는 어떤 미래의 가능성이라는 면에서 죽음의 무게를 비교하는 근거가 되어버린다. 희생된 이들은 수많은 ‘오늘’을 잃은 것이며 그 가족과 친구에게는 사랑하는 ‘네가 없는 오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어지고 있는 ‘현재’의 고통에 다가설 때 그 고통을 덜 수 있는 ‘우리’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메시지를 이 기록은 던지고 있다. 둘째, 절망과 비관 속에 건네다 보지 말고 절망 위에 함께 서기. 총체적, 종합적 비리와 부정, 무책임이 빚어낸 세월호 참사는 들여다볼수록 이것이 인간과 우리 사회의 본질인가 싶은 절망을 품게 한다. 그런데 그 절망 앞에서 나는 세상이 이렇게 굴러가는 데 대한 책임이 내게는 있지 않은 것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나는 ‘그런 어른’의 세계에 발 담그지 않았으며 ‘사회운동 활동가’로서 비판하고 경고해왔다는 어떤 알리바이를 내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절망 속에 핀 꽃인 셈이죠. 그런데 절망 속에서 피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꽃 피우려고 얼마나 아등바등 했겠어요? 그때 도와준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어요?...나는 주저앉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발버둥칠 거예요.” (희생학생의 언니)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현실의 고통에 깊숙이 연루되어버린 이들이 절망 속에서 꽃을 피우는 동안 나는, 혹은 우리는 ‘그날’이라는 과거의 슬픔 속에 그들이 머물러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지 않았나 했나. 처음엔, 직접 듣거나 여러 기록을 통해 접한 정보들이 뒤섞여 그날의 상황이 짜맞춰지는 듯 해 그것에 몰두하느라 그 날 이후의 ‘오늘’을 힘겹게 살아온 이들이 보내오는 메시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 너무 고통스러웠지, 그런 일을 이겨내고 이제 곧 어른이 되는구나’라는 관습적인 태도에 머물러 있었음을 책을 몇 번 더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직 피지 못한 안타까운 죽음’이란 말의 함정

“저는 그냥 어른이 된다는 게 싫어요... 모든 어른들은 원래 어린아이였고 그들이 자라서 이 나라를 이끌어나가고 있잖아요... 우리도 어른이 될 거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저는 그 사실 자체가 너무 두려워요. 자기가 한 일도 책임 못 지면서 자기들만 생각하고 반성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 그런 어른이 될까봐... 그런 어른들을 싫어하면서 그런 사람이 될까 봐...” (생존학생)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어른’의 사전적 의미다. 그날 그 배에서 ‘어른’이 아닌 많은 이들이 속절없이 사라져갔다. 서로를 도와 죽음의 문턱을 넘어 살아 돌아온 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간다. 그날의 ‘어른’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과연 ‘어른’들은 존재했나.

죽음은 ‘미래의 상실’이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 사람과 직접 관계를 맺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 사람의 앞날이 더 이상 없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어린이나 청소년 등 아직 ‘어른’이 아닌 것으로 분류되는 어린 사람들의 죽음은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미래의 상실’로 여겨진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그와 동시에 ‘네가 없는 현재’의 연속이다. 갑작스러운 ‘너의 부재’는 그 이유조차 알 수 없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과거’의 일이 되지 못한 채 끝나지 않은 장례처럼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희생학생의 형제자매들은 매일같이 아웅다웅하던 피붙이를 잃었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억누를 것을 강요받았다. 친구들을 잃고 사선을 넘어 돌아온 생존학생들은 ‘어른’이 되기 위해 일상으로 돌아가 공부를 해야 했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억눌린 채 하루하루 살아냈을 것이다.

“언니들과 미래를 상상하면서 같이 하기로 한 일도 많았는데 이제는 할 수가 없어요... 언니가 그렇게 되다 보니까 앞으로 미래가 불확실한테 섣불리 뭔가를 판단할 수 있을까 싶어요.”
“사고 후엔 학원 버스를 한 번도 탄 적이 없어요. 제가 다니는 학원버스가 단원고 앞을 지나갔거든요. 버스 타고 가다보면 학교에 불이 켜져 있으니까 ‘아 오빠가 지금 야자 하고 있겠지’ 생각을 했는데...”
“언니가 알고 보니까 살아 있어서 우리 집에서 같이 지냈다. 다리를 다쳤을 뿐이었다... 너무 기뻐서 언니가 친구들과 연락할 수 있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깨어나니 달라진 건 없었다.”
“동생이 없다는 느낌이 들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해요. 정신을 놓다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고 너무 화가 나서 누굴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감정이에요... 시간이 멈춰버렸다는 거,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아요.”
“동생이 꿈에 자주 나와요. 항상 배경은 집이고, 그전이랑 똑같은 모습. 그런 날은 하루 종일 아무 일도 못하죠. 군대에서 짬이 낮을 때는 실수해서 많이 혼나기도 했고.”
“오빠가 남기고 간 말이 되게 막 슬프고... ‘오빠는 그 때 자기가 나올 수 없다는 걸 안 게 아닐까.’ 많이 무서웠겠죠, 그 배 안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면서...(고 박수현 학생이 찍은 동영상에 담긴 고 김동혁 학생의 말은 “내 동생 어떡하지”였다.)
“얼굴에 이렇게 상처가 난 거예요... 어디에 쓸린 것 같아요. 껍데기가 벗겨졌는데, 그게 너무 슬픈 거예요. 지현이가 지금 숨을 안 쉬고 죽었는데, 그게 슬픈 게 아니고 여기 다친 데, 그게 너무 슬퍼서 꺼이꺼이 목이 터져라 울고. 얼마나 아팠을까...왜...상처가 났냐구!’”


어린이와 청소년을 ‘미래의 주역’이라고 일컫는 것은 대개 ‘현재’의 삶을 억압하는 요소가 된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성공하려면’ 등의 말은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사실 가능성은 조건의 차이에 따라 이미 제약되어 있다.)을 북돋는 말이라기보다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말을 꺼내기 위한 관용어에 불과할 때가 많다.

세월호 참사는 피해자들은 물론 지켜본 모든 이들을 충격과 슬픔에 빠뜨렸다. 특히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아직 피지도 못한 어린 생명들의 죽음’에 대한 ‘어른들의 미안함’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짧았고 여전한 슬픔 속에 살며 진실을 밝히고자 거리를 헤매는 유가족에 대한 공감은 더욱 짧았으며 정부여당이 주도한 보상에 집중한 ‘어른’식 셈법은 유가족들을 모욕하는 근거가 되었다. 패닉상태인 생존학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들이대던 카메라는 주홍글씨를 새긴 채 십대의 막바지를 안간힘으로 버텨온 이들에게 다시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우리에게 좀 더 중요한 건 ‘어른으로서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이런 참사를 대비하지 못한, 모든 피해자에 대한 책임감’ 아닐까.” (닫는글 중)

나는 ‘어른’인가 아닌가

1주기가 조금 지난 화창한 날이었다. 세월호 약전작업을 위해 ‘희생학생’의 친구들을 만났다.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이들 중 한 명은 옆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한 명은 단원고에 다니는 ‘생존학생’이었다. 피자를 신나게 먹고 카페에 앉아 즐거웠던 추억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고3 학생들의 목소리가 햇살처럼 환했다. 그러다 ‘그때’ ‘그 사건’ 이야기가 나오자 생존학생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 순간부터 나는 몹시 당황했고 말들은 공중에 흩어지는 듯 했다. “공부 열심히 해”라고 작별인사를 건네곤 씁쓸해져 그들이 다닌 중학교 교정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무능한 어른이고 무력한 기성세대라고 느껴졌다. 나는 어른이 되기 싫은 사람처럼 살아왔는데 이제 나이가 먹어 어쩔 수 없으니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른’이 무엇인지 모르겠는 것이었다. 나는 희생학생들의 ‘언니’, ‘이모’ 같은 생각으로 이 문제를 대하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고 그것을 이후에 부끄러워하며 반성한 일이 있었는데, 그 다음의 접근법은 어때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어른’이라는 말을 버리기로 했더니 문제가 좀 더 분명해졌다.

우리는 소위 ‘어른’들끼리는 많은 것을 합의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 성인이 되면 시민으로서 이 사회-국가와 계약을 맺고 타인과 공존할 도덕 원칙을 합의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계약서를 쓴 적도 없는데 말이다. 어른이 되는 시기는 투표권이 주어진 이후라고도 하고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면서부터라고도 하고 결혼이나 출산을 해야 진정한 어른이 된단다, 하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모호하다. ‘어른’이란 말 자체가 끊임없이 경계선을 긋고 경계인을 낳는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인간이 질적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게 아니니 ‘어른’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살라는 채찍질만 남는다. ‘성숙한 인간이자 시민’이 되라는 주문은 강력한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함께 돌아볼 기회가 좀처럼 없다. 대학생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다고 한심하고 반시민적 행태라며 꾸짖으면 어른다운 행동인 건가. (근거도 없이 행해진 발언이었거니와 거대정당들의 승자독식 구조인 현행 선거제도에서 투표 참여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인식은 터무니없다.) 나이는 훌쩍 먹어도 취업이 안 되거나 높은 주거비용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들은 어른인가 아닌가. 결혼하고 출산해야 어른이라는 말은 매우 구시대적인 발언 같지만 여전히 왕왕 들리는 얘기다. 그러니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이 널렸고, ‘진정한’이니 ‘참’이니 하는 수식어도 ‘어른’ 앞에 갖다 붙이게 되는 것이다.

실상 우리는 합의한 것이 없는데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대개 법으로 정해진 ‘금기’와 ‘억압’의 내면화다. 또는 법보다 무서운 ‘돈’이 이끄는 ‘자유’의 보장이다. 비리와 부정을 눈치껏 해내는 것도 어른의 능력으로 간주된다. 빈곤이나 범죄로 미끄러지는 ‘어른’에게는 가혹한 비난이 쏟아진다. 사회 구조를 돌아보기 전에 ‘어른’의 룰을 어긴 무자격자나 악마로 삼는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세월호 선장 이준석을 악마화하는 시선이 많았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과 구조와 사고 대응과정에서 철저히 무책임했던 정부와 해경이 그런 논란을 부추겼다. 침몰 당시 항해사가 20대 여성이라는 점은 선장의 무책임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살펴보면 과연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승객들은 물론 부상당한 동료를 버리고 도주한 선원들 모두, 그리고 배 안의 승객들의 상태를 파악조차 하지 않은 채 구조하러 달려와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이들을 지켜만 보던 해경 대원들, 사태의 심각성과 국민의 안위 파악보다 상부보고만이 책임의 전부라 여기는 청와대 관계자, 그토록 위험한 배를 만들고 승인하고 과적과 무리한 운행을 눈감은 그 모든 이들이 악마라면 우리는 악마들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란 말인가. 그들은 사전적 의미의 ‘어른’들임에 분명하다. 그것이 ‘어른’들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시선을 의심하고 현실의 절망을 뚫고 나온 목소리가 이 책에 담겨 있었다.

“그 선장님이 사형선고를 받아야 된다는 종이에 이름을 쓰라고 할 때도 차마 못 하겠더라고요. 손이 벌벌 떨려서 종이를 뚫어져라 봤어요. ‘잘못을 했으니까 죽어야 마땅하다?’ 그 사람이 아무리 죽을 짓을 했더라도 내가 이 사람을 죽여야 되겠다고 사인하는 게 너무 두려워서... 이왕 어른이 된 거, 나 자신은 미워하더라도 모든 사람을, 모든 어른을 미워하진 말자. 어른이 되면 어떻게 행동할까. 책임감을 가져야지. 어른들이 못했던 걸 내가 해야지... 보여주고 싶어요, 책임지는 모습.” (생존학생)

가만히 있으라

기울고 물이 차오르는 배 안에서 승객들은 공포에 떨며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반복되는 안내방송은 승객들을 주저앉혔다. 배의 3층 로비의 출입문까지 바닷물이 들어온 시각 9시 45분에 여객부 선원 강혜성은 “현재 위치에서 안전하게 기다리시고,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못 박은 안내방송을 되풀이했다. 이미 선장과 갑판부 선원은 모두 배를 빠져나간 시간이었다. 비상벨은 끝내 침묵을 지켰고 구명정, 미끄럼틀 등 탈출도구는 제 역할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뱃속에 가라앉았다. 그로부터 배가 가라앉기까지 약 45분의 시간이 있었지만 탑승객의 3분의 2가 넘는 304명이 배를 빠져나오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러나 승객들은 의심했다. 그리고 살기 위해,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몸부림치고 타인을 도왔다.
“가만히 있으래서 가만히 있었는데 방송을 몇 번째쯤 할 땐 그 사람이 말을 더듬는 거예요. 저는 들었거든요. 방송 이렇게 듣고 있는데 말을 계속 더듬길래, 아, 저 사람도 무섭나 보다... 저희는 단체실이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혼자 있었다면 가만히 안 있었을 거 같아요. 무서운데 침착하게 기다렸어요.”(생존학생)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 소리를 듣는데 제 상식으로는 너무 안 맞는 거예요. 반 아이들한테 ‘일단 배가 뒤집힌 상황이면 나가야지 가만히 있으라는 게 말이 되냐, 한번 확인해보겠다’하고 나갔어요...”(생존학생)


세월호 참사의 교훈 하나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와 국가는 나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었다. 그런데 타인과 국가에 대한 불신만 남고 서로를 지킬 울타리를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결과는 끔찍할 것이다. 해경과 정부 관계자 중 고위 관료들은 모두 책임을 피해가고 해경 중 현장에 출동한 123 정장만이 처벌을 받았다.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을 책임지지 않는 이 상황은 ‘어른’들과 ‘어른’이 되려는 이들에게 어떤 교훈을 남겼나. ‘어른’이라는 말 대신 한 사람의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새롭게 관계 맺어야 하는가 묻고 있다. 나이, 성별, 직업, 직위, 빈부격차, 장애유무, 국적 등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한 배에 타고 있다. 위기 상황은 물론 평소에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시민이자 이웃이 될 준비가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 구조를 새롭게 재편할 모색을 함께 해야 한다. 그날 이후도 여전히 울려 퍼지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의심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라, 이게 어쩔 수가 없어요. 이런 게 너무 만연하잖아요. 자신들이 바로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아픔을 겪는 당사자이신데도 또다시 자기 애들은 걱정이 돼서 가만 있으라고. 그래서 이번 단원고 교실존치 피케팅하는 것 주제가 이거예요. ‘또다시 가만히 있으라?’ 또.다.시. 그래서 애들이 이렇게 됐는데, 또다시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 하지만 부모님들한테 뭐라 할 순 없어요. 이해가 가니깐.” (희생학생의 언니)

동료가 되어 진실에 다가가겠다

“말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삶의 고난과 역경을 겪었고 그것을 함께 극복하고 성장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대학에 가서도 사회에 나가서도 스스로가 강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2016 단원고 졸업식 졸업생 답사 중)

세월호 참사 1주기에 희생학생들의 형제자매 74명이 성명을 발표했다. 그들은 “엄마아빠의 동료가 되어 진실에 다가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많은 형제자매들이 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할 수 있었던 건 ‘기적’과 같았다고 했다. 나와 닮은 친구 같던 내 형제자매가 이제는 없는 삶에 적응하기조차 힘든데 친구들의 냉정한 한마디가 가슴에 꽂히고 주변 ‘어른’들은 분노와 슬픔마저 억누르는 것 같았을 것이다. 가슴이 아프다고 표현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당장 행동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제 너 혼자니 네가 잘 해야 한다는 당부들만 들려왔을 것이다. 내가 겪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미래를 그려나가야 한다는 강요에 짓눌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학생의 형제자매들은 ‘어른’의 동료, 아니 한 사람의 성숙한 시민으로 서고자 했으며 생존학생들은 자신이 경험한 고통을 딛고 친구를 위해,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날의 기억을 곱씹고 돌아보고 있었다.

“정치권의 임기는 몇 년이지만 세월호 형제자매라는 이름의 임기는 죽을 때까지니까. 우리가 잊지 않고 있으니까. 부모님 세대에서 밝혀내지 못하면 우리 세대에서라도 꼭 밝혀낼 것이다. 그걸 권력에게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희생학생의 언니)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누구나 가슴이 미어진다. 살릴 가능성이 있었는데 살리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던 그 마음들은 더 타들어가고 더 무너진다. 이걸 겪어보지 않는 사람들은 모른다. 그러나 직접 겪어보지 않고도 우리를 위로해주고 한마음이 되어주고 이해해주는 분들에게는 정말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감사함을 느낀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피해자들만을 위한 게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난 생존학생의 기록)
“행복할수록 눈물이 나고 슬플수록 남을 존중한다. 요즘 제가 되새기는 말이에요. 사고를 겪고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행복을 느끼는 매순간에도 늘 슬픔이 동행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슬픔과 고통도 뭉치면 더 강해지지 않을까. 고통을 이겨낸 만큼 더 남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러고 싶어요, 그럴 거예요.” (생존학생)


이들이 손을 내밀고 있다, 지금. 일단 귀 기울이자.
덧붙임

최예륜 님은 반빈곤활동가로, 세상만사 걱정을 글에 담고 싶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