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너무 속상하다. 뉴스를 보지 않고 살 수도 없고, 내가 안 본다고 그런 일이 안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B: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고로 숨진 그 청년 노동자의 죽음 때문이지?
A: 내가 그 나이 때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읽으며 펑펑 울었는데, 이런 일이 아직도 벌어지다니.
B: 나중에 <전태일 평전>으로 바뀐 그 책 말이지?
A: 한 사람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했고 한 사람은 ‘갓 졸업한 공고생 자르는 게 청년 일자리 정책인가’라는 피켓을 들었고…….
B: 빤히 보이는 위험 앞에서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어 목숨을 위협받아. 실제로 목숨을 잃는 일이 너무 자주 벌어져. 말할 수 없기에 사람이 너무 쉽게 죽고 다치는데, 뭐가 ‘첨단’을 달린다는 거지? 사람대접이 구석기 시대인데 첨단의 시대엔 도대체 누가 살고 있는 거야?
A: 그놈의 일자리의 위계만 날로 심해지고 있지. 일을 하면 다 같은 노동자인데, 거기에 등급을 매겨 신분제도처럼 만들어버렸어. 첨단시대가 아니라 거꾸로 신분제 시대야.
B: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선 작업할 수 없다’고 ‘말을 할 권리’가 왜 일하는 사람에게 존중되지 않을까?
A: 그러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임금 보장이 물질적 존중이라면 노동자의 목소리 존중도 중요해. 일을 하면서 정신적으로도 존중받아야지. 노동자가 자기 일에서 통제력과 재량을 발휘할 수 있고 동료와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말이야.
B: 그분들이나 숱한 노동자들이 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듣지 않는 것 아닐까? 위험을 외주화하지 말라고, 필수적인 노동을 불안정한 상태로 내몰지 말라고, 나 홀로 근무를 방치하지 말라고 오래전부터 말해온 것 같은데…….
인격 살해의 목격자
A: 부인을 못하겠네. 나부터 말을 안 할 뿐 아니라 듣지도 않으려고 했어. 나부터가 입을 열 상황이 못 돼. 나는 요즘 인격 살해의 현장에서 늘 목격자이고 방관자인 것 같아.
B: 인격 살해? 뭔 무시무시한 말이야?
A: 요즘 내 직장 상황이 그래.
B: 그래도 너는 안정적이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잖아.
A: 남들 보기에 번듯한 직장이라지만, 속으론 곪는다 곪아.
B: 왜 그러는데? 일이 너무 많아 지쳐서 그래?
A: 단지 ‘지친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 같아. 뭐랄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랄까.
B: 무력감?
A: 맞아. 무력감! 딱 그 단어다.
B: 너처럼 열심히 사는 애가 무력감이라니?
A: 최근 사무계약직을 몽땅 자르는 거야. 근데 대부분이 숙련도가 높고 이곳을 아끼는 분들이야. 나도 일하면서 이분들에게 많이 의지해왔거든. 그분들 일은 원래 정규직이었는데 비용 절감한다고 몇 년 전 무기계약직으로 바꾸더니 이번엔 아예 물갈이한다고 단기계약직으로 바꾼다는 거야.
B: 해고는 아니네.
A: 명목상 그렇지. 하지만 사실상 제 발로 나가라는 거나 마찬가지야. 다들 굴욕감과 배신감에 떨면서 짐 싸고 있으니까.
B: 비용절감이니 경영합리화니 그런 말로 그러는 거지?
A: 그러게. 사람을 비용취급밖에 안하니. 내 방에 계신 한 분은 평생직장이라 생각하고 헌신해왔는데 먹고 살 걱정보다 배신감이 더 크다고 우시더라구.
B: 속상하겠다. 근데 네가 왜 무력감을 느껴?
A: 그런 부당한 일의 한복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안 그래도 내가 평소에 따박따박 따진다고 관리자 눈치가 장난이 아니거든. 요즘은 쓸 데 없는 것들로 괴롭혀. 괜한 절차와 서류를 만들어서 자기한테 부러 결재 받으라고 하고. 안 해도 되는 일 만들어 시키고. 그 사람과 실랑이하면서 진이 빠져. 그 와중에 동료들이 짐 싸는 걸 멍하니 지켜보자니 사는 맛이 없다.
B: 나는 괴롭힘이 사회적으로 나쁜 일자리라 불리는 직종에서만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너처럼 번듯한 직장에서도 그렇구나.
A: 하는 일과 역할이 다를 뿐인데 신분에 의한 위계질서가 있는 양 굴면서 힘으로 찍어 누르는 상황에서 일해야 하잖아. 나야 직급과 권한이 있으니 막 대하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힘들게 해. 그런데 다른 업무를 보는 사람들에겐 정말 막 나가. 쥐꼬리만한 월급, 과다한 업무도 힘들겠지만 그런 인격모독은 숨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아. 그걸 지켜보는 나는 인격살해의 현장에 서있는 거고. 결국 목격자이면서 방관자인 거지.
B: 말도 해 본 사람이 하고 말을 하는 걸 당연시하는 환경이어야 할 수 있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길들여져 온 걸 생각해봐. 그냥 묵묵히 착실히 따르라고만 하잖아. 그게 우리에게 모욕과 경멸을 가르치더라도 말이야.
일터란
A: 이 답답한 상황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부당해고, 성폭력, 노동 재해……, 노동 문제로 말할 문제야 넘치고 넘치지. 그런데 지금껏 써온 이런 말로는 콕 짚을 수 없는 미묘한 갈굼이 있어.
B: 미묘한 갈굼?
A: 예전 같으면 그냥 잘랐을 거야. 그러면 부당해고라고 따져볼 수라도 있지. 그런데 지금은 ‘너는 하찮은 존재다’, ‘얼마든지 싼 값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자꾸 주는 거야. 아주 모욕적으로 들들 볶아. 그래서 제 발로 나가게 만들어. 내 동료들이 처한 상황처럼 말이야. 이런 걸 짚는 말은 없는 걸까?
B: 뭐, 요즘 언론에선 ‘직장 괴롭힘’ ‘직장 내 괴롭힘’이란 말이 많이 나오잖아.
A: 내가 직장에 다니지만, 직장이란 말로는 성이 안차.
B: 왜?
A: 시도 때도 없는 전화, 카톡, 이동 중이건 뭐건 어디서건 늘 접속해서 응답해야 돼. 퇴근해도 퇴근이 아니야. 교육이나 연수, 팀워크 훈련이란 이름으로 필참 해야 하는 행사도 넘치고 말이야.
B: 하긴 요즘 일이란 걸 옛날 연속극에서나 나오는 사무실, 매장, 공장에서만 하는 게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일터 아닌 곳이 없지. 또 다른 문제도 있는 것 같은데. ‘직장’이라고 하면 거기 소속된 사람만의 문제 같은데, 직장 있는 네 문제가 직장 없는 나 같은 사람의 문제와 별개라고 하기가 좀 그렇네. 취업준비생, 실습생, 인턴, 실업자, 자영업자, 소비자 등이 모두 일터와 관계가 있어. 근데 직장이라고 하면 직장 안 사람들만의 문제로 보일 수 있겠네.
A: 또 다른 문제도 있어. 고용주 갑질 뿐 아니라 소비자 갑질도 문제지. 자기 직장에서 깨진 노동자가 딴 곳에 가서는 다른 노동자에게 진상을 부리기도 하지. 저임금에 야간노동과 초과노동을 감내하는 노동자가 많을수록 알량한 일자리도 줄어들지. 싸고 고분고분하게 쓸 수 있는 한 명이 있으면 고용주는 두 명을 쓸 일이 없지.
B: 그럼 직장 말고 일터라고 하는 건 어떨까?
A: 일터? 야, 이렇게 괴로운 공간을 일터라고 하면 왠지 오글거리지 않냐?
B: 일과 관련된 위험의 원천이 되는 모든 장소와 시간, 그리고 관계를 포괄할 수 있는 말이 될 수 있어. 그리고 공동의 터인 만큼 같이 살아가며 같이 바꿔나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일터’라고 하는 거야.
A: 그럼, 너도 일터의 주인공이네.
B: 그렇지. 나처럼 공식적인 직장이 없는 사람도 엄연히 일이란 걸 엄청 많이 하고 있거든. 그런데 사람들은 고용된 노동이 아니면 일한다고 취급해주질 않아.
A: 그러게. 너나 나나 일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B: 그래도 돈 번다고 밥은 네가 늘 사잖아? 후후.
A: 고용된 직장에서의 노동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일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갈 때야. 그런 의미로다 너와 나는 ‘일터’로 연결되는 거네.
문제는 권력격차, 권력 불평등이다
B: 그럼, 같이 괴로운 건가?
A: 하지만 나는 층층시하, 겹겹의 위계 속에서 일하는데 너는 네가 좋아서 하는 일만 하잖아.
B: 하하, 내가 부러울 때도 있구나. 그런데 일터에서의 괴롭힘이란 걸 뭘까? 네가 말한 미묘한 갈굼이란 것 말야. ‘괴롭힘’이란 말의 어감이 좀 그래. 그냥 자기가 불쾌하고 불편하면 죄다 괴롭힘이라고 할 것 같아.
A: 너랑 나랑 티격태격하는 걸 갖고 괴롭힘이라고 할 수는 없지. 사실 엄청 괴롭긴 하지만.
B: 뭐?
A: 농담이야 농담. 너와 나처럼 대등한 관계에서 다툼과 갈등이 있는 건 당연지사야. 티격태격할 수도 있고 장난을 칠 수도 있지.
B: 그거랑 괴롭힘은 뭐가 다를까? 경계가 너무 희미한 것 같아. 사소한 갈등이 사생결단 낼 싸움이 될 수도 있고 웃자고 한 장난이 모욕이 될 수도 있고.
A: 핵심은 권력격차, 권력의 불평등이지.
B: 권력 격차?
A: 우리 어렸을 때 시소놀이 많이 했잖아. 올라갔다 내려갔다, 시소 타듯이 아웅다웅하며 지금까지 왔지. 괴롭힘의 관계는 전혀 달라. 괴롭힘의 가해자와 표적에게는 권력 차가 있어.
B: 권력 구조는 아주 복잡하잖아.
A: 그렇지. 공식적인 권력 구조에서 위계나 지위가 낮은 사람이 괴롭힘을 당하기 쉬워.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작용하는 권력도 무시 못해. 실력자의 친인척이라거나 낙하산 인사이거나 등등. 그러니까 괴롭힘은 그냥 성격이 나빠서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드는 그런 게 아니라 일터에서 권력관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걸 지목하는 거야.
B: 흔히 피해자더러 용기를 내서 저항하라고 하잖아?
A: 그게 말이 쉽지. 일터에서의 권력 불균형이 얼마나 심한 줄 알아? 권력 격차를 문제 삼지 않고 괴롭힘 당한 사람의 개인 성향 탓으로 돌리는 게 젤 속상하고 억울해. 사실 괴롭힘 당하는 사람 중엔 나처럼 ‘고분고분하지 않다’, ‘복종적이지 않다’는 이유가 많을 걸.
갖은 방식으로
B: 도대체 어떤 식으로 괴롭혀?
A: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어. 동원할 수 있는 방식은 다 동원된다고 볼 수 있어. 경영전략으로다 대놓고 생산성 향상전략으로 포장된 괴롭힘 정책을 쓰기도 하고, 아무래도 직장이니까 업무와 관련된 괴롭힘이 많아. 그리고 업무는 사람이랑 하는 거니까 대인간 괴롭힘이 당연히 붙어 다니지. 저질 중의 저질은 뭘 집어 던지거나 부수고 때리고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심리적‧정서적으로 아주 교묘하고 은밀하게 괴롭히기도 해.
B: 딴 건 쉽게 예상이 가는데 은밀한 방식은 뭐야? 예를 들면?
A: 내 상사 같은 경우엔 필수적인 정보를 전해주지 않거나 단 둘이 부딪칠 때는 인사를 안 하고 무시해. 딴 사람 앞에서는 큰소리로 인사하면서. 또 나에 대해 이상한 소문을 내곤 해. 나랑 친하게 지내면 불이익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은근히 만들고.
B: 아이고. 관두라고도 못하겠고 버티라고도 못하겠고. 정말 힘들겠다.
A: 아까 말한 것처럼 무력감이 밀려들 때가 젤 힘들어. ‘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뜨리는 게 그쪽의 가장 큰 목표인 것 같아서 안간힘을 쓰고 버티는 거야.
B: 너에게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란 말은 절대 안할 게. 먹고사니즘을 강조하는 게 저쪽을 돕는 것 같아.
A: 맞아. 내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다’ 하면 저쪽이 되려 그걸 이용해먹는다니까. 명백한 가해자에 대해서도 ‘먹고 살려다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누구 신세 망칠 일 있느냐, 조용히 지나가자’ 식으로 먹고사니즘을 들고 나와.
B: 먹고사니즘 말고도 일터괴롭힘을 방조하는 통념들이 많을 거야. 그런 것들부터 허투루 보아 넘기지 말아야겠어.
A: 나는 지금 내 직장에서 일터괴롭힘의 목격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해. 또 어디 가서는 가해자일지도 모르지. 겪으면서도 이게 도대체 뭔지 이 괴롭힘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겠어.
B: 어떤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 이것이냐 저것이냐 개념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뭘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중요하다더라. 일터괴롭힘의 개념 정의도 따져봐야겠지만,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넘쳐나는지 뭘 해야 할지 궁리해보자.
A: 아플 때 병명과 증세라도 알면 위안이 되잖아. 또 병에 대해 사람들이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면 힘이 되잖아. 일터괴롭힘도 그렇지 않을까? 지금 뭐가 뭔지 모를 이 고통에 사람들이 이름을 불러주고 통증에 공감해준다면 좋겠어. 적어도 ‘왜 아프냐?’, ‘그까짓 것 같고 그러냐?’, ‘더 힘든 사람들이 천지다’는 식으로 타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B: 나부터 이름을 불러줄게. 또 뭘 할까? 우리 뭘 같이 할 수 있을까?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