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내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 알아?
B: 새삼스럽게 웬 장래희망 묻기야?
A: 한번 물어봐줄래.
B: 그래. 어색하지만 물어볼게. 넌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어?
A: 미안하단 말을 할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었어.
B: 겨우 그거였어?
A: 겨우가 아냐. 너, 제 때 ‘미안하다’, ‘잘못했다’라고 인정할 줄 아는 어른 본 적 있어?
B: 어어, 생각해보니 잘 안 떠오르네. 과오를 없던 일처럼 뭉개거나 ‘그 정도 했으면 됐지’라며 자기 합리화하거나 체면 봐서 넘어갈 주길 바라거나……. 뭐 대충 그런 것 같은데.
A: 그것 봐. 그래서 내 희망은 여전히 잘못을 시인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거야.
B: 나한테도 물어봐줘. 어떤 국가의 시민이 되고 싶은지.
A: 보편적 복지 빵빵하고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되는 국가?
B: 그건 정말 먼 희망사항이고. 적어도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할 줄 아는 국가의 시민이 되고 싶어.
A: 야아, 국가는 지독한 인권침해의 최고 가해자야. 그런 국가에게 잘못의 인정을 기대하다니. 그건 내가 사과할 줄 아는 어른이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B: 그렇지. 너와 나 같은 보통 시민이 하는 사과와 국가의 사과는 달라. 너와 내가 주로 부딪치는 사과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인 경우가 많잖아. 잘못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관계회복을 이룰 수 있는 단순한 사과에 속하는 경우일 거야. 하지만 국가의 경우는 권력 행위의 대가로서 져야할 책임이야. 명백한 과오와 범법에 대한 사죄인 것이지 도덕적 양심에 따른 그런 걸 요구하는 게 아니잖아.
A: 너와 내가 잘못을 뭉개는 것과 국가가 국가범죄에 관한 행적을 권력과 법으로 은폐하는 것은 달라도 한참 다르지.
B: 국가는 가해자인 동시에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이중적 지위를 지고 있어.
A: 국가는 그만한 힘을 갖고 있으니까.
B: 그러니까 국가는 피해자에게 사죄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책임을 인정하고 실효성 있는 후속조치를 취할 의무까지 져야 돼.
A: 과연 우리는 사죄할 줄 아는 국가의 시민이 될 수 있을까?
부인을 부추기는 잔혹함
B: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게 사죄잖아. 그런데 사죄는커녕 부인을 해도 아주 고약한 방식으로 부인을 하고 있으니…….
A: 사죄할 줄 모르는 정부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없는 사회에 걸맞는 정부가 아닐까?
B: 난, 나한테 걸맞는 정부가 그런 정부라고 생각하지 않아.
A: ‘외압은 없었다’는 말을 하는 소위 전문가들, 피해자를 오히려 난도질하는 사람들이 정부의 부인과 회피를 응원하고 있잖아.
B: 자신의 영혼을 버리고 권력자의 생각과 선호에 자신을 맞춘다.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길이 성공이다. 성공하고 출세하면 불의를 행하고도 처벌받지 않는다. 이런 게 사죄를 가로막는 삼종 세트지.
A: 참 잔인하다. 타인이 겪는 고난을 못 본 척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잔인함 또는 잔혹함이라 하는데.
B: 타인의 고통에서 잠재적인 나의 고난을 상상할 수 있고, 그렇기에 피해자와 동료감을 느끼는 시민이 되어야 하는데. 미안함과 동료감은 아무리 나눠가져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지는 것인데 왜 잔혹함마저 경쟁하는 걸까?
A: 저렇게 국가에게 죽임을 당해도 저런 대접을 받는구나, 우린 정의의 바깥에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우린 무슨 가치를 믿고 누구를 신뢰하며 어떻게 서로 의지할 수 있을까?
B: 그래서 우린 꼭 사죄를 받아야만 해. 이 사회에 어떤 멍석을 까느냐에 따라 앉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어. 우리가 멍석을 바꾸면 설령 악마 같은 이들이라도 잔혹함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을 거야. 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들에 걸맞는 정부를 가질거야.
사과 받을 권리, ‘사죄하라’는 명령문
A: 우리 예전에 인권피해자의 권리에 대해 얘기했던 것 생각나?
B: 응. 유엔에서 만든 ‘인권피해자권리장전’에 대해 얘기했었지.
A: 거기에서 최소의 출발점으로 ‘공식적인 사죄’를 꼽고 있잖아.
B: 그 권리장전은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의 구제와 피해회복의 원칙과 방법을 열거하고 있어. 그중에 ‘만족(satisfaction)’이란 항목이 있어. 만족에 포함되는 게 책임의 인정과 공식적 사죄야.
A: 권리장전 말고도 또 있어. 국제법위원회가 만든 ‘국가책임법 초안’이란 게 있는데, 거기에도 ‘만족’이란 항목에 의무위반의 인정과 공식적 사죄를 언급하고 있어.
B: ‘만족’이란 말밑에 공식적 사죄가 속해있다는 게 의미심장한 것 같아.
A: 그치? 그 만족은 어디까지나 피해자가 흡족할만한 사죄를 말하는 거잖아. 가해자의 자기변명이나 상황의 모면 또는 충실한 책임 이행을 회피할 목적으로 하는 사죄는 사죄로 보지 않는 거야.
B: 솔직히 그런 기준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면 사죄부터 하고 보는 게 상식이 아닐까? 또 사죄를 했으면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뭔가를 행동으로 옮겨야지. 그래야 사죄라는 말에 걸맞지. 이것도 상식, 저것도 상식이다.
A: 그렇지. 피해자에게 사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게 뭐야? ‘권리’라는 건 그 상대방에게 그렇게 할 의무를 부과하는 거야.
B: 그래서 난, ‘사죄 받을 권리’를 ‘사죄하라’는 명령문으로 생각해.
A: 우린, 지금 ‘제발 사과해주세요’라고 읍소하는 게 아니라 ‘사죄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거야.
B: 난 ‘사죄 받을 권리’가 직접적인 피해자의 권리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물론 ‘사죄 받을 권리’는 피해자가 응당 받아야할 배상 등의 권리와 연관되지만, ‘재발 방지 조치’ 같은 건 나와도 직접 연관되는 문제야. 나뿐 아니라 잔혹함을 배제하고 공감의 멍석을 까는 인권의식이나 사회체제의 변화와 관련된 문제야.
A: 그러게. 난 요즘 한국 사회가 합동위령제 사회 같아. 오래전 얘기지만, 영화 <괴물>이 개봉됐을 때 ‘합동위령제’ 장면이 참 ‘한국적’이란 말이 오갔던 게 생각나.
B: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강남역, 구의역, 지진과 태풍, 군납품비리 등으로 이어진 죽음들, 그 속에서 무책임과 무능력과 적반하장만 연출한 정부, 각자도생으로 내몰리는 삶……. 정말 이대로 ‘합동위령제’만 지내다 끝내는 사회여야 할까?
사죄로부터 시작되는 ‘말’의 정치
A: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라는데, 이 정부가 망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말’을 망친 게 치명적인 것 같아. 말 같은 말을 하지 않을뿐더러 대화는 없고 독백만 있잖아.
B: 말을 죽이는 정부가 결국 사람까지 죽였어.
A: 그래놓고 사과는커녕 폭력시위 운운하면서 계속 말을 죽이고 있네.
B: 온 몸으로 말하는 직접행동의 말을 못 알아들으면서 어떻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를 할 수가 있지?
A: 고 백남기 님을 봐봐. 정부의 책임지는 말을 이끌어내기 위해 행동하다 말을 망친 정부의 물대포에 쓰러지셨어.
B: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왜 ‘말’로 안 하고 ‘직접행동’을 하냐는 반대자들의 비아냥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어. “사회적 쟁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켜 더 이상 흐지부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직접행동을 하는 이유”라고 말이야.
A: 고 백남기 님이 계셨던 자리의 사회적 쟁점들이 어디 한두 가지야? 쉬운 해고를 비롯한 노동개악 중단, 재벌 책임 강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쌀 및 농산물 적정 가격 보장…….
B: 그분은 인간성에 대한 존중을 몸으로 말해주셨어. 자기 일상을 희생하면서 용기를 다해 불의를 고발하다 쓰러지셨어.
A: 그런데 남은 자들은 그분의 죽음에 대해 사실을 증언하고 인정할 용기조차 가지지 못하다니.
사죄 없는 정부, 무력감의 직사
B: 국가범죄에 대한 사죄 없는 정부는 결코 어떤 일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걸 공언하고 있는 거야.
A: 우리에게 계속 직사하고 있어. 무력감을 말이야.
B: 말이 통하지 않는 정부, 시민을 대화의 상대방으로 인정하지 않는 정부가 쏠 수 있는 건 무력감뿐이야.
A: 사죄는 정부가 시민과의 관계를 인정하고 대화하는 거야. 바꿔 말하면, 우릴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관계를 부인하기 때문에 사죄하지 않는 거야.
B: 개인끼리도 사과가 제 때 적절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관계가 일그러지잖아. 건성으로 사과하거나 사과의 말과 다른 행동을 보이면 오히려 불화만 커지잖아. 하물며 시민과 국가 사이에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한 적절한 사과가 없으면 정말 관계를 부인하는 거잖아.
A: 피해자의 ‘사죄 받을 권리’란 진상규명, 배상, 재발방지 보장 등의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걸 포함해.
B: ‘사죄’는 피해자의 존재와 가해자와 피해자와의 관계를 인정하는 거야. 관계를 부인하는 마당에 피해자의 참여는커녕 피해자가 오히려 표적이 되는 게 가장 악질적인 피해의 확대재생산이야.
A: 사인이 명백한 고인에 대한 부검 시도 같은 게 대표적이지. 유엔과 국제인권단체 등 국제인권사회 뿐 아니라 사죄 없는 정부의 폐해를 이래저래 숱하게 겪은 시민들이 비난하고 있는데 계속 버티기네. ‘비난의 수용’도 사죄의 구성요소란 걸 모르나봐.
B: ‘내키지 않는다’, ‘싫다’고 도리질하고 내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인권침해와 국가범죄에 대한 귀결로서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져야 할 책임이라는 걸 모르면 그런 직분과 직무를 가져선 안 되지.
A: 뭘 노력하다가 잘해보려다가 벌어진 실수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엄연한 범죄에 대한 사죄인데 말이야.
B: 미국의 어느 법관은 “지나치게 오래도록 지연된 정의는 부정된 정의이다”라고 했어. 지나치게 오래 끄는 사죄는 부적절하고 실패한 사죄가 될 수 있어.
A: ‘누가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란 질문이 있지. 누군가 ‘강자에 의한 약자의 권리 침해를 막으려고 법이 있다’고 답했어. 법 앞에 권력이 먼저 꿇어야 하는 거라구. 권력이 우릴 야단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권력을 야단치기 위해 법이 존재하는 거라구. 그러니까 불법행위에 대해 빨리 사죄하라고 우리는 명령문을 발사하는 거야.
B: 그래. 할 일이 태산인데 얼른 사죄부터 해야지. 국가범죄와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사죄는 일회적인 표명만으로 사죄의 행동이 완결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이 엄청 많아. 사죄에 따른 후속행위의 실천을 통해야만 사죄의 진정성을 판단할 수 있다구.
A: 은폐, 부패, 악폐는 이제 그만.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재발방지로 가는 길에 이정표는 ‘사죄 먼저’야. 이제 길 좀 제발 나서보자. 출발 좀 해보자구.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