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계적 조직문화와 일방적 소통, 폭력적 관계는 운동단체라고 예외일 수 없고, 인권단체라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인 듯하다. 사람이 모이고 이야기를 하고, 일을 만들어나갈 때 갈등과 엇갈림은 어쩌면 당연할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조직 안에서 문제를 얘기할 수 없거나 얘기를 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불신이 생기고 강요받는 느낌이 들고 무력감에 빠진다. 상대방의 시선과 말이 나를 위축시키고 더 이상 말조차 섞기 싫어지는 상황이 될 때, 상대방의 얼굴조차 마주하기 싫어 피하게 될 때 어느새 폭력은 일상의 경험이 된다. 우리는 모두 폭력이 없는 세상을 바라면서 폭력에 반대하지만 폭력의 일상성은 무엇이 폭력인지, 그것이 왜 폭력인지를 헤아리기 어렵게 한다.
2014년 서울인권영화제는 “김일숙 전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의 소수자 차별 및 활동일상에서의 가부장적 폭력성과 서울인권영화제의 조직구조 상의 한계들”대한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사랑방의 반성폭력 교육이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자 폭력과 위계 구조를 다시 보고 해체하는 것을 고민하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이 사건을 함께 얘기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공개된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울인권영화제는 이 사건을 ‘가부장적 폭력성’으로 규정하면서 성폭력 문제를 보는 여성주의의 관점과 해결 과정을 참조하고 있어 이번 반성폭력교육의 주제로 삼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먼저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들(상임활동가와 자원활동가)의 입장과 사랑방의 고민, 이 사건을 접한 타 단체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사례로 정리하고 사건 해결을 위해 이들에게 인터뷰를 한다면 어떤 질문을 할지 얘기해 보았다. 이 과정은 폭력을 맥락에서 살핌으로써 폭력의 문화적, 구조적 속성을 이해하고 폭력에 연루된 사람들의 관계를 그려보는 것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어떤 감정과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이들의 관계를 어렵게 했던 구조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직접적인 당사자는 아니지만 연루된 이들의 고민과 어려움은 무엇이었는지를 보는 시간이었다.
다음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 날맹이 개인의 치유, 관계의 회복,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열쇠말을 바탕으로 폭력 해결의 의미와 방향을 짚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더 충분히 듣고 질문하는 시간을 갖지 못해 아쉬웠지만 현재 이 사건의 해결과정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질문이 필요한지를 생각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면 사건 공개 이후 진행과정은 어떠했고 무엇이 더 짚어져야 할 문제일까?
첫째,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한걸음을 내딛기 위해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질문하면서 위치를 잡아야 한다. 사건 해결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대책위의 구성원이 되어 사건 해결자로 위치 설정을 했으나 그동안 겪었던 폭력적 상황에서 쌓인 심리적 어려움을 가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이자 해결자, 상임활동가의 경우 자원활동가들을 지지, 지원해야 하는 역할도 해야 했다. 복합적인 위치와 정체성을 가진 피해자의 상황이 사건 해결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인권교육 등의 요구를 했으나 관계가 단절되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해자와의 관계 단절이 사건 해결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랑방과 들이 이후 영화제와 어떤 관계를 설정하고 이 사건의 대한 얘기를 이어갈 수 있는지도 과제로 남아 있다.
둘째는 사건 해결 과정에서 점검하거나 만들어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들이다. 운동단체에서 활동가들 사이에 활동기간과 경험의 차이가 있고 활동가 간의 정보, 의사결정의 불균형, 관계의 위계가 작동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사건의 전조를 읽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까? 성폭력 사건을 참조해서 이 사건이 설명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유형의 폭력을 말할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하고 운동사회 내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한 경험이 거의 없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인권활동가로서 이것을 어떻게 운동 의제로 만들 수 있을까? 또한 이 사건이 단지 한 단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운동사회 내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이야기되고 공유하는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단초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즉 사건이 사건화 되었는가?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사건화 할 수 있을까? 여전히 여기저기서 사건이 들려오지만 사건화 되지 못하고 우리의 운동의제로 만들어지지 못한 채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있는 상태인 듯하다. 우리에게 여전히 충분히 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