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부터 내년 1월까지 일 년 동안 안식년을 씁니다. 2008년 여름 상임활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식년 제도를 도입하기로 하면서 기다렸던 안식월 사용을 못하게 되었다고 툴툴거린 기억이 납니다. 그때까지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자신 없었는데, 시간은 흘러 내게 올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안식년에 들어가게 되네요.
일 년 동안 뭐 할 거냐고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단번에 이야기하는 것은 ‘거리두기’입니다. 조금만 얘기를 보태면 거리두기를 하면서 제 안을 들여다보는 그런 시간과 기회를 갖고 싶다는, 가져야겠다는 바람입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고, 거창할 수도 있는 그런 바람을 갖게 된 것은 어떤 불안 때문인 것 같아요. 사랑방 상임활동을 시작하고 어느덧 7년,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만큼 활동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성장했나 새삼스레 돌아보면, 자신 있게 끄덕일 수가 없네요. 시간이 지나면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전 제가 그어놓은 원 안에만 머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자격지심 떄문일지 “활동가의 자질이란 게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난 활동가에 부합되는 사람일까?” 뭐 그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시간도 있었어요. 직면하다보면 극복이 된다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자극을 받기도 했었지만, 여전히 전 기자회견이나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아야 하는 것을 참 두려워합니다. 글 써야 할 때 느끼는 막막함도 여전하고요. 활동하면서 필요한 일종의 스킬도 참 갖고 있는 게 없습니다. 회피형 인간이라 어쩔 수 없다며 방어벽을 치고, 제게 흔들림을 주는 어떤 순간들을 제대로 직면하지 않아왔다고 생각해요. 당연한 말이지만, 그저 시간이 지난다고 달라지는 게 아님을,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체감하게 된 것 같습니다.
활동이라는 게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관계들 속에서 확장되기도 하고 응축되기도 하면서 이루어지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자기 몫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몫을 할 때 비로소 어떤 ‘전환’이 가능해질 거라고 생각하고요. 얼마 전 새로운 상임활동가 입방 절차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제게 부족하고, 꼭 필요한 것이 ‘호기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호기심은 타인을 향한 것만이 아니라 우선 제 자신을 향한 것입니다. 사소한 어떤 결정들에서는 단순하다 못해 단호한 저이지만, 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별로 생각하지 않아왔던 편이에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묻는 질문들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곤 합니다. 당혹감을 느끼고 싶지 않으니 가능하면 그런 이야기들은 피하는 편이고요. 그런데 누군가의 삶을 나누고 전하고자 할 때, 저 자신을 설명할, 표현할 말들을 쥐고 있어야 하는 것 같거든요. 불변의 명제 같은 것은 아니고, 어떤 시작점 같은 것 말이에요. 거기서부터 누군가와 만날 준비가 가능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를 붙드는 중심 같은 게 없는 채로,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못한 채로 흘러흘러 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좀 차분하게 제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들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마이크를 쥘 때의 두려움, 글 쓸 때의 막막함 이런 감정들은 막연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어떤 당위만 앙상하게 있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누고 싶은지 저 스스로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더 크게 생기는 게 아닐까 싶거든요. 막연하게 어떤 불안을 갖고 그것을 순간순간 넘기는 방식으로는 한 치도 나아질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오랜 시간 묵혀오고 미뤄왔던 저 스스로를 향한 질문들을 정리해보고 곱씹는 그런 시간을 일 년 동안 이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편지를 안식년으로 미뤄왔던, 저를 흔들었던 어떤 순간들, 질문들을 곱씹어보고 정리하는 기회로 삼아야지 야심찬 포부가 있었는데 어렵네요. 별 것 아닐 수도 있고, 거창할 수도 있는 바람, 다짐을 새기면서 일 년이라는 시간 잘 보내고 돌아오겠습니다. 어떤 ‘전환’을 기대하는 마음을 잘 붙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