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열두 달 중 모든 요일이 공평하게 들어있는 2월을 맞으면서 그 같은 공평함만으로도 특별해지는 것 같다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맴돌며, 광화문 광장에 울렸던 목소리들이 떠올랐다.
"이 사회가 달라지지 않는 한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뭐 그리 달라질까 싶습니다. 박근혜 퇴진이라는 구호에 담긴 진짜 의미는 '박근혜만 퇴진하면 된다'가 아니라 '박근혜 퇴진 이후는 다른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근혜 이후 세상은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이길 바랍니다. 일하는 사람이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 세상, 그게 제대로 된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퇴진 촛불 100일을 하루 앞두고 열린 집회에 함께 한 노동자의 말이다. 지난 2월 1일 파업에 나선 도시가스 검침 노동자였다. 그 노동자의 바람은 일터에서 일상에서 부딪히며 체득한 공평함의 감각에서 나온 건 아닐까 생각했다.
도시가스 검침 노동자, 그/녀들의 촛불
일 년에 두 번 안전 점검 방문 때마다 만나온 이들이지만, 그때 난 서비스를 제공받는 '고객'일 뿐이었다. 잠자는 시간을 빼곤 대부분 집을 비워서 점검을 하기까지 수차례 걸음을 했을 그/녀들의 수고로움에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꼈지만, 어떤 조건 속에서 그 걸음을 딛는 것일지 알지 못했다. 가려져 있는 것 마냥 보지 못했던 그/녀들이 보이기 시작한 건, 유난히 더웠던 작년 여름 도시가스 검침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모였다는 소식을 접하면서였다.
매월 사용량 검침과 고지서 송달, 반기별 방문 점검까지 노동자 한 사람이 담당하는 세대 수가 대략 3400 가구, 하루에 최소 300 가구를 돌아야 겨우 소화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특히 방문 점검을 해야 할 때는 이른 아침과 늦은 밤, 주말과 공휴일도 불사해야 하지만, 간주근로제와 포괄임금제가 적용되어 초과 노동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과도한 업무량으로 쉴 새 없이 이동해야 하고, 외진 곳에 위치한 계량기 확인을 위해 위태롭게 난간에 매달리다 다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부분 여성 노동자로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안전 매니저'라 불리지만, 그/녀들의 노동현실은 안전과는 거리가 멀기만 하다. 그렇게 일해도, 10년을 일해도 최저임금을 겨우 웃도는 수준의 월급이다.
공공적 성격을 띤다고 말하기가 무색하게 도시가스가 소비자에게 공급되는 과정은 이윤 극대화가 목적인 민간회사들에 내맡겨져 있다. 도시가스 회사들은 한국도시가스공사로부터 구입한 도시가스를 소비자에게 공급하고 요금만 받을 뿐, 사용량 검침‧요금 징수‧안전 점검‧계량기 관리‧체납 관리‧공급 중지‧가스레인지 연결‧고객 관리 등등 관련된 모든 업무는 수많은 고객센터로 쪼개어 위탁한다. 서울시의 경우 5개의 회사(서울도시가스‧예스코‧코원‧귀뚜라미‧대륜)가 71개의 고객센터로 관련 업무를 위탁하고 있다.
도시가스 공급 비용은 회사가 임의로 정할 수 없고 정부, 지자체로부터 승인을 얻어야 하는데 이때 공급 비용에는 도시가스 회사가 고객센터에 지급해야 하는 위탁 수수료가 포함된다. 비용 절감을 위해 도시가스 회사가 고객센터에 위탁 수수료를 낮게 지급하면서 부실한 서비스에 따른 민원이 높아지자 2013년 정부는 위탁 수수료 산정에 지자체가 개입하는 규정을 마련했다. 도시가스 요금과 위탁 수수료가 산정되는 과정에서 검침 노동자의 임금도 결정된다.
서울시가 개입하면서 고객센터에 지급되는 위탁 수수료는 높아졌지만, 검침 노동자의 임금은 제 자리를 맴돌았다. 고객센터별로 검침 노동자의 급여 및 근로계약 형태가 제각각이라 서울시가 산정한 임금에 미달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지자체가 개입함으로써 최소의 '기준'을 마련한 건데, 그에 못 미치는 임금 실태나 근로기준법 위반 사례에 서울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공공의 개입이 형식으로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정부로부터 독점적으로 가스공급을 받아 파는 이윤은 도시가스 회사가 독차지하면서 가스공급과 관련된 온갖 노동과 관리는 고객센터로 외주화 한다.
고객센터는 다시 한 푼이라도 더 챙기려고 실제 업무를 담당하는 검침 노동자들을 저임금과 고용불안, 장시간 노동에 내몰고 있다. 건강과 안전이 위태로워도 이는 오롯이 각 센터별로 나뉘어진 검침 노동자 개인의 몫으로 떠넘겨졌다. 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임에도 각자도생하게끔 내모는 힘에 맞서 함께 모이는 것, 개별적인 사례나 상황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부당한 구조 그 자체를 인식하고 겨냥하는 것, 다른 내일을 그리는 시작은 그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들은 노동조합으로 뭉쳤다. 그리고 지금 그/녀들은 광장에서 들었던 촛불을 파업으로 이어가고 있다.
광장의 촛불을 일터와 일상으로 이어갈 때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에 분노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다. 촛불 100일을 맞으며 누적 참여자가 1100만 명을 훌쩍 넘었고, 오늘도 촛불은 타오르고 있다. 박근혜와 최순실, 재벌들과 권력 실세들은 서로를 사다리 삼아 더 큰 이득을 챙기는 데만, 더 높이 올라가는 데만 몰두했을 뿐 국민들, 노동자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었다. 굳건한 동맹처럼 이루어진 그들의 부당거래에 우리는 분노했고, 이미 밝혀진 진실조차도 모르쇠 하는 그 뻔뻔함에 모욕감을 느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일군 민주주의는 저들에 의해 쉽게 짓밟혔다.
광장에 켜진 촛불은 그동안 우리가 겪은 부당한 현실을, 깜깜한 시대를 비추었다. 광장에서 외쳐진 도시가스 검침 노동자들의 현실은 지금 노동자로 일하며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의 오늘이다. "빨리 말고 안전이요" 최근 자주 접하는 배달사고 예방을 위한 정부의 공익 광고다. 소비자가 재촉 않고, 배달 노동자가 안전운전을 하면 된다는 이런 접근은 빠른 배달 서비스를 어필하며 틈새를 넓혀 이익을 취하는 회사와, 건당 수당이 지급되는 방식이라 속도가 곧 돈인 배달 노동자의 현실을 은폐한다. 구조적 차원의 문제를 개별적 차원으로, 소비자와 노동자의 책임으로 뒤바꾸는 것이다. 부당함을 더욱 견고히 구조화하면서 정권과 자본은 모든 책임과 위험을 하청회사, 외주업체, 노동자들에게 떠맡겨왔다.
부당한 노동조건을 바꾸기 위한 검침 노동자들의 파업은 직접적으로는 고객센터-도시가스 회사를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지만, 비슷한 형편으로 오늘을 견디는 노동자들, 검침 노동자들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가는 시민들의 싸움이기도 하다. 빡빡한 살림살이에 야근과 특근을 마다할 수 없어 주말 집회가 꿈같은 사람들, 기계처럼 노예처럼 다시 시작된 월요일에 광장에서 내뿜었던 열망이 꿈같은 사람들, 그저 꿈으로 두는 것이 아닌 다른 내일이 펼쳐지길 바라며 동시대를 사는 우리가 함께 벌여내야 하는 싸움인 것이다.
"세상에 나오는 건 누구나 평등해도 사는 일은 그렇지 않았는데, 참 다행인 것은 그 누구나 죽음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네요."
스스로 목숨을 저버리는 것이 공평함에 대한 유일한 경험이라던 어느 노동자의 유서를 떠올려본다. 간신히 오늘을 버틸 뿐 다른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을 멈추자는 것, 촛불에 담긴 간절함은 각자도생이 아닌 '함께 살자', 생존이 아닌 '존엄한 삶을 살자'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되찾자는 열망은 개별적으로 '유권자'에만 머무른 채 제도정치에 다시금 내맡긴다는 것이 아니다. 주권자로, 권리의 주체로 우리의 삶과 노동을 함께 지키겠다는 것이다.
다른 일터, 다른 일상을 위해 광장에서 들었던 촛불을 파업으로 이어가는 검침 노동자들을 기억하며 광장의 촛불이 곳곳으로 번져가길 바란다. 일터와 일상에서 함께 모이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부당함에 맞서면서, 그렇게 함께 쌓아올린 사회적 경험 속에서, 함께 몸으로 체득한 감각에서 진짜 민주주의, 더 많은 민주주의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