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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세상의 셈법을 잊어버리는 순간

안녕하세요. 저는 2주에 한번씩 사랑방에서 진행하는 노란리본 인권모임에 간신히 참석만 하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아직 자원활동가라는 명칭이 너무 어색하고 더구나 소식지에 글을 올리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지만 며칠 전 '활동가의 편지'를 갑자기 요청받아서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스무살 때 입대 후 훈련소에서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를 쓰고 난 이후로 편지를 써본 기억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전에 쓰인 '활동가의 편지'를 보니 이것은 제가 감당할 수준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저는 생생한 경험담을 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글솜씨를 뽐낼 수 있는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동네 조기축구하러 나왔는데 영국의 프리미어리그에서 공격수로 뛰어야하는 심정입니다. '어떻하지?'라고 내 자신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지만 그래도 포기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몇 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국어보다는 수학을 좋아해서 글쓰는 것보다는 셈하는 것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 수학은 답을 도출하는 과정이 정확하고 명료해서 논란의 여지가 없고, 원리만 이해하면 암기할 필요없이 어떤 문제가 나와도 풀 수 있기 때문에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난 후 무언가를 계산하는 것은 이해득실을 따지는 피곤한 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나 중요한 결정을 해야할 때 자본의 논리로 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느낄 때 너무나 답답하고 슬펐습니다. 얼마 전 출근길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내용이 공감이 되어서 그 중 일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계산을 잘하는 것은 좋은 일일까. 어린 시절 설레는 마음으로 소풍 날짜를 손꼽아 기다릴 때는 신났지만, 어른이 되고나니 계산한다는 것은 대부분 머리 아픈 일이 되어버렸다. 통장 잔고나 연말정산을 떠올릴 때도, 하나 둘 늘어가는 흰머리를 셀 때도, 무언가를 센다는 것은 다가올 소멸의 시간을 헤아리는 것 같아 슬퍼진다.

 

그런 서글픔을 가슴에 안은 채 김준태의 '감꽃'을 읽는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셋지 /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감꽃'을 읽으며, 계산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무엇을 계산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빛깔이 달라짐을 느낀다. 늘어가는 주름살을 세어보는 것은 슬프지만, 아기가 태어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엄마가 예정일을 세어보는 것,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이 기념일을 세어보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닌가. 올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셈해보는 것은 슬프지만, 행복했던 순간들을 하나 둘 가만히 헤아려보는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지.

 

'무언가를 세는 것'을 생각해보니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산하기'의 장면 중 하나인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떠오른다.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 별 하나에 쓸쓸함과 / 별 하나에 동경과 / 별 하나에 시와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별을 하나하나 헤아려보며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을 떠올리다가, 문득 어머니가 떠오르자 별 헤는 몸짓이 저절로 멈춰진다. 그토록 그리운 것, 그토록 아린 것을 생각해내는 것은 모든 계산을 잊게 하지 않는가. 별을 세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세는 것을 나도 모르게 불현듯 잊어버리는 이런 순간이 참으로 좋다. 계산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순간. 세상의 셈법을 잊어버리는 순간. 그런 순간 덕분에 우리의 삶은 아직 꿋꿋이, 견딜만 하기에.

 

- [정여울의 문학기행] 중에서 '무언가를 세는 것'의 슬픔 일부를 담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