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冬至)가 고단한 홈리스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매년 동짓날마다 홈리스행동 등 여러 단체들이 모여 거리에서, 시설에서, 쪽방과 고시원 등지에서 돌아가신 홈리스들을 추모하는 자리가 이어져왔다. 홈리스 추모제가 열리는 동짓날은, 겨울 어느 날이고 안 추운 날이 없지만 평소보다 기온이 더 떨어져 여느 때보다도 추웠던 날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번 동짓날엔 날이 풀렸다. 밤이 되어도 기온이 영상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이전보다 서울역 광장 계단을 더 가득 채운 사람들이 든 촛불과 온기가 섞여서인지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매번 추모제 시작 전에 팥죽을 나누는데, 늘 모자란다는 얘길 들어왔고 또 개인적으로 팥죽을 좋아하지 않아서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팥죽을, 아기동지라 새알을 부러 뺀 팥죽을 (동지라고 같은 동지가 아님을 알았고) 이번 추모제에서 처음 먹어봤다. 그래서이기도 했지만, 이번 홈리스 추모제는 특별히 더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세 번째로 이어진 돌아가신 홈리스 분들의 생애기록을 모으는 작업에 함께 했는데, 그 책자가 추모제 당일 나왔다. 그리고 지난 가을학기 홈리스야학 권리교실에서 함께 만든 인권선언을 추모제에서 발표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주변을 맴돌기만 하다가 조금 더 가깝게 다가선 느낌이랄까. 이런저런 자리들을 통해 홈리스행동과의 인연이 있었지만, 2017년은 그 인연의 선이 조금은 더 촘촘해지고 두터워진 것 같은 느낌이다.
사랑방 활동가들이 연이어 참여해온 홈리스행동 운영위원회에 지난해 함께 하게 되면서 홈리스행동, 빈곤사회연대 등의 단체들이 함께 생활하는 둥지 아랫마을을 오갈 일들이 정기적으로 있었다. 그러다 2017년 어느덧 10년째 이어지고 있는 홈리스야학 가을학기 권리교실에서 인권 관련 수업을 5차례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담당에 인권운동사랑방이라고 쓰여져 있었는데, 격주 수요일 저녁에 진행되는 일정에 함께 하기가 쉽지 않고, 연속선에서 쭉 해나가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간담회로 반차별 시간을 대체하고 나머지 4차례의 일정을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들의 조언을 구하면서 어찌어찌 진행해왔다. 이러한 교육 경험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용기를 낸 것이기도 했는데, 용기를 낸 이후로는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던 것 같다. 인권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인권이 뭐지? 인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는 게 뭐지? 스스로를 붙드는 질문이 많아지고, 자괴감도 들면서 나의 좌표는 어디 있나 찾아 헤맸던 것 같다.
저마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겪었던 경험들을 들으며 인권이 따로 있는 게 아님을, 우리가 이야기하는 권리들이 그저 목록화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삶에서 출발한 목소리들이 담겨 그 자리들이 생겨왔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이 시간이 서로의 삶을 통해 함께 배우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만이 아니라 몸으로 배우는 그런 시간 말이다.
돌아가신 홈리스 분들의 생애기록을 모으는 작업에 함께 하며, 2016년 여름 서울역에서 오랜 시간 생활하시다 돌아가신 故 김기성 님의 지인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었다. 故 김기성 님은 다리를 다쳐 휠체어에 의지하며 생활하셨고, 오랫동안 아프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제때 제대로 치료를 받았다면, 임시로 지원받은 주거가 오르막 언덕에 위치한 높다란 쪽방이 아니었다면, 의지가 되는 동료와 함께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는 거처가 마련되었다면, 그의 삶과 죽음이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질문이 계속 들었다.
그런 질문의 연속선에서 홈리스야학 학생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권운동이 귀기울여 들어야 할 목소리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이런 이야기가 그냥 스쳐지나가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를, 구체적으로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행동으로 이끄는 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5차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홈리스 인권선언>을 만들었다. 그리고 12월 22일 홈리스 추모제날, 서울역사 안에서 이 선언을 펼치고 우리의 권리를 함께 외쳤다. 이 선언이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접하고, 빈곤과 차별을 넘어 누구나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걸음에 작은 불빛으로 비춰지면 좋겠다. 2018년 다가올 동짓날은 사람의 자리가 한 뼘 더 넓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