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활동 이야기

<공동정범>, 다시 쓰는 진상 규명

<공동정범>이 극장 개봉을 하루 앞둔 날 시사회에 다녀왔다. 몇 차례 본 영화였지만 극장판도 놓치지 않고 보고 싶었다. 달라진 편집이 눈에 들어왔다. 주제가 훨씬 선명해졌다. 그러나 다소 위험할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역시나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관객이 있었다. “용산참사 진상규명에 꾸준히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 기다리던 영화였다. 영화는 매우 훌륭하다. 그런데 진상규명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아 당황했다.”

‘진상규명’에 대해 말하지 않는 영화?

난감하다는 듯 질문을 던진 관객의 고민은 어렴풋이 짐작 됐다. <공동정범>은 ‘진상규명’에 관한 일반적인 문법을 전혀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거짓이 어떻게 진실을 왜곡하는가, 피해자는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가, 남아있는 의혹은 무엇인가, 진상규명의 열쇠는 어디에 있는가……. 영화는 이런 질문을 꺼내지도 답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진상규명을 위해 이 영화를 꼭 보라고 권해야 할 이유는 모호하다.

오히려 영화는 피해자들이 서로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 여러 관객들이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표현하거나 “감독에 대한 높은 신뢰” 등으로 평가하는 점이다. 영화에서 피해자들은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는 투사가 아니다. 상처가 너무 깊어 일상도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아픈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들은 서로를 원망한다. 함께 연대해 싸운 동지인 줄 알았는데 정말 그랬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인간적인 정(情)도 없어 보인다. 영화를 권하기 애매할 뿐더러, 잘 모르는 사람들은 차라리 보지 말아줬으면 싶을 수도 있다.

물론 영화는 다섯 명의 철거민이 갈등하다 흩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난 관객 한 명은, 위로받는 영화였다며 감독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적당히 봉합하거나 서둘러 화해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화해’를 향해 편집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서, 위로 받는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이해받지 못하는 서운함을 앓아본 사람들은 안다. 가까울수록 화해가 어렵고, 어느 한쪽이 못나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토닥여준다. 그러나 ‘진상규명’과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 때문에 모두가 죽었을까?”

2009년의 내게도 ‘진상규명’은 으레 쓰는 말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참혹한 사건이지만 누군가는 감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철거민들이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나의 분노는 추상적이었다. 잘못된 재개발제도와 경찰의 살인진압이라는 문제는 사라져버리고 왜 철거민들만 감옥에 갇혀야 하는 것인가! 추상적으로라도 억울함은 짐작했으나 죄책감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공동정범>의 등장인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세월호 생존학생들의 고백과 자주 겹쳤다. 수학여행을 같이 떠났다가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들은 죄책감을 고백했다. 세상 모두가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생존학생들은 그런 말들로 자신의 어깨에 드리운 책임감을 덜어내려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죄책감을 쉽게 털어버리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사건에 연루시키고 진실에 가담시키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학생의 부모들에게도 물음표는 사라지지 않는다.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물음표는 쉽게 자신을 향한다. 가지 않겠다는 아이를 왜 보냈을까, 아침에 걸려온 전화를 왜 안 받았을까, 심지어, 안산으로 왜 이사를 왔을까……. 무엇이든 책임지고 싶을 때, 그러나 아직 진실에 닿지 못할 때 그것은 ‘죄책감’이라는 옷을 입는다. 그래서 <공동정범>의 포스터는 묻는다. “나 때문에 모두가 죽었을까?”

다시 쓰는, 진상규명

세월호 유가족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에서 유경근 님(예은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제천화재 소식을 접하고) 사람들한테는 불타는 건물이 보이는데 나한테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보여요. 그래서 방송을 못 봅니다.”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우회하고서 애도는 불가능하다. 예고되지 않은 모든 죽음은 억울하고 원통하다. 진상규명은 화재의 원인을 밝히는 데서 끝날 수 없다. 죽은 이를 대신해 마지막 순간을 기억할 말들을 찾아야 한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다가오는 시간들을 어떻게 맞았나. 무엇이 아프고 무엇이 그리웠나.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이 자신밖에 없다. 살아남은 자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 순간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마지막 순간을 기억할 말들을 찾아야 비로소 산 자와 죽은 자가 해후할 수 있다. 죽음의 이유를 모를 때, 살아남은 자들은 죄책감도 벗어날 수 없다. 막을 수 있던 어떤 순간들이 확인되지 않으니 후회만 미끄러진다.

<공동정범>의 피해자들은 일상의 궤도로 진입하지 못하고 자꾸 1월 20일 새벽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갑자기 치솟은 불길의 기억만 선명할 뿐, 그날의 기억은 비어있다. 어긋나거나 틀렸고, 희미하거나 까맣다. 아프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함께 구속됐던 동료들이야말로 서로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자기 아픈 줄만 알고 남 아픈 줄은 모른다고만 느껴졌다. 그래서 외로웠다. 여기에서, 다시 그날의 기억을 채워내는 것이 진상규명이다.

마지막 순간을 기억할 말들

그날의 기억이 텅 빈 것만은 아니다. 유일한 국가 공식 기록인 판결문은 말한다. 철거민들의 농성을 적법하게 진압하던 경찰이, 공무집행 중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에 의한 화재로 사망한 사건. 국가는 화재의 원인을 입증하지도 못하면서(정확히 말하면, 화재의 원인을 입증하지 못한 덕분에) 참사의 생존자들을 희생양 삼아 위기를 모면했다. 보상 더 받아보려고 망루를 짓고 불법 행위를 벌인 철거민들, 아버지와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철거민들, 동료들을 사지에 버려두고 도망나온 철거민들......

참사로 숨진 다섯 명의 철거민은 참사를 초래한 공동정범이 되어버렸다. 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할 말들은 국가가 가져가버렸다. 때리고 죽이는 것만 국가폭력이 아니다. 그 사건을 규정하고 기억을 독점해버리는 것은 국가의 근원적 폭력이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로 기억시키려고 박근혜 정권이 벌인 일들을 기억해보라. 게다가 국가의 '진상규명'(검찰 수사와 재판)은 경찰의 죽음만 문제 삼았다. 다섯 명의 철거민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유를 밝힐 필요조차 없다고?

살아있을 때 국가로부터 버림 받았던 철거민들은 죽어서 버려짐을 확인 당했다. 이들이 버텼던 힘이 '연대'다. 철거민운동에서 ‘연대 간다’는 ‘다른 지역의 투쟁에 참여한다’는 뜻의 매우 구체적인 사실 행위를 일컫는 일상어다. 건물이 부서지고 사람이 끌려 나올 때 지켜줄 사람들은 동료 철거민들밖에 없다. 주거권을 외쳐도 세상은 보상 더 받으려는 수작이라는 손가락질만 돌려주었고 법은 언제나 소유권자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대’에는 연대의 가치보다 불안이 더 깃든다. 내준 만큼 받을 수 있을까, 받은 만큼 갚을 수 있을까? 감옥에서 나온 철거민들이 서로에게 품은 의심은, 세상이 철거민들에게 학습시킨 의심의 연장선일 뿐이다. 죽은 철거민들이 당한 수모는 살아서 그들이 당한 수모의 연장선인 것처럼. 진실이 도래해야 하는 자리가 이곳이다.

진실이 도래해야 할 자리

'공동정범'은 문제적 법리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바라는 것이 주범과 종범을 잘 가려달라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범죄인지 다시 쓰자는 것이다. 다시 써야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호소하는 <공동정범>은 필름 속까지 진상규명에 관한 영화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진상규명'의 소재나 경로를 이탈하여 진상규명을 희구하는 증언이다.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 좋겠다. 용산참사 진상규명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촛불로 세상을 들었다놨으면, 누군가 죽었을 때 억울함과 원통함을 밝힐 줄 아는 나라 정도는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영화를 보고 난 관객 중에는 “피해자가 훌륭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등장인물들을 변호하듯 말하는 이도 있었다.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흠결 없음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중요한 지적이다. 그러나 피해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옹호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진상규명이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기 위한 길을 트는 과정이라면, 산 자들 사이의 만남 역시 그 길에서 열려야 한다. 좋은 사람은 좋고 싫은 사람은 싫은 거다. 그렇게 못 만나면 어쩔 수 없다.

다만 누군가 피해자이기 전에 우리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동료 시민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녀가 좋건 싫건 그것이 권리를 누릴 자격을 제한하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이건 존엄이 짓밟히지 않을 수 있도록,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누리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도록 사회 자체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지 않은가? 그 방법을 찾아가는 길이 진상규명이다. <공동정범>의 등장인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