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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백수의 ‘회동’

저는 2017년 12월 31일로 잘 다니고 있던 인권단체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생계를 아슬아슬하게 연명해 가고 있는 비파나라고 합니다. 흔히들 ‘백수’라고도 하지요. 주변에서는 제게 지금 당장 어디라도 쉼을 가지러 떠나라며 걱정스런 채근을 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을 터이니 이제 저를 돌볼 때라는 고마운 걱정입니다.

 

그런데 ‘유유상종’이라고 일을 쉬고 있다 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시민·사회단체에서 일을 하다 일을 잠시 놓고 있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 보면 우리끼리 웃으면서 ‘백수가 과로사 한다’고 ‘일 좀 줄이라’며 서로 충고를 하기도 한답니다.

 

시민사회단체에서 일을 하다 잠시 일을 접은 분들은 비슷한 느낌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일을 그만두게 되면 불쑥 오던 전화가 줄어들고, 밤이 늦도록 아우성을 치던 텔레그램과 카톡이 조용해지며, 매일 아침 줄줄이 클릭을 기다리던 이메일 계정은 아예 사라지고 없습니다. 아주 낯선 상황이지요. 출근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늦은 아침 커피 한잔을 즐기는 것도 잠시, 애꿎은 방바닥을 긁으며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는 날이 곧 오게 됩니다. 저는 이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습니다. 일을 손에 놓은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엉덩이가 들썩들썩 했거든요.

 

듣고 싶었던 강의를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영어 공부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한 노동조합에서는 15년을 묵혀 두었던 농성 자료를 스캔을 뜨고 시간 순서대로 정리했으며, 후원주점에서 좁은 주방을 날렵하게 날아다니며 늦지 않게 안주를 내보내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몇 건의 번역도 했지요. 또 한 단체에서는 소식지 발송 작업을 돕기도 했네요. 10년 동안 마음에만 품고 있던 모 합창단 오디션에도 알토로 당당히 합격해 곧 단원으로도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내 품을 내어서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만, 어딘가 소속되어 상근을 하고 있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맘껏 하고 있으니 나름대로 호사스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셈입니다. 이 와중에 제가 4월부터 인권운동사랑방 자원활동가 모임에 나간다고 하니 주변에서는 다들 백수가 과로사 한다며 난리를 쳤습니다.

 

저는 몇몇 인권운동 단체에 약간의 로망(?)과 마음의 빚이 있는데 인권운동사랑방도 그중 하나입니다. 2016년 시작한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문헌들을 읽는 노란인권모임에 여전히 합류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선 올해 4월 냉큼 합류를 했지요.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사랑방 활동가 전화번호가 간만에 핸드폰에 화면에 뜨면 반가움보다 부담과 걱정이 앞서곤 했습니다. ‘뭔가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하면 어쩌지. 아마도 또 못할 것 같아...’ 제가 일했던 곳은 이미 확립된 국제인권기준을 바탕으로 일을 하는 곳이어서 몸도 약간은 무겁고 정책적인 제약도 많았던 반면, 인권운동사랑방은 ‘여기까지만 인권’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함께 새로운 인권의 목록을 만들어 가는 곳이었기에, 함께하고픈 일들이었으나 함께 하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니 함께 하지 못한 만큼의 로망도 마음의 빚도 쌓였지요.

 

‘여기까지만 인권’이라고 인권을 가두려고 할 때 인권의 현장에서 싸우는 이들이 고립이 되지 않도록 인권의 시각에서 다시 보고 고민하고 기획하며 연결하는 운동을 해온 곳이 인권운동사랑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함께 하자고 전화를 돌리고, 모여서 제안서와 기획안을 쓰고 일을 나누고, 필요한 이들을 섭외하고, 현수막과 발표 자료를 모으고 만들고, 취재를 요청하고... 연결하고 모여서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 가는 인권 ‘운동’. 밀양송전탑 건설반대 싸움이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활동에서 다른 여러 인권단체들과 함께 인권운동사랑방이 그런 운동을 만들었다고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5월 10일 이제 막 인권운동사랑방 자원활동가라는 이름을 달고 사랑방 이사 전 청소를 돕다보니 운 좋게 손에 넣은 물건이 있습니다. 2013년에 만들어진 인권운동사랑방 20주년을 기념타월이었지요. 흰색 바탕에 알록달록 ‘회동’이라는 두 글자가 예쁘게 자수로 박혀 있었습니다. 회동, 모여서 움직이다. 바로 그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활동가들이 모여든 곳이 말 그대로 인권‘운동’의 사랑방이 되었겠지요. 그러고 보니 저도 노란리본인권모임을 통해 잠시 접어 두었던 인권운동과 다시 연결되고 사랑방과 함께 모여서 움직이고 있네요.

이제 새로운 사무실로 이사도 했으니, 새로운 기운을 얻어 더 많은 이들이 인권운동사랑방으로 모여들고 왁자지껄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 가기를 바래봅니다. 저도 주변에서 아무리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핀잔을 주더라도 괘념치 않고 힘껏 ‘회동’해 보겠습니다.